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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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신동엽도 문익환도 없는 서울

김형수

김형수

나는 2019년에 가장 많이 회자될 시로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꼽아왔다. 「껍데기는 가라」는 1967년 신구문화사의 『52인시집』에 게재된 작품이니, 물경 50년이 넘는 세월의 저쪽에 위치한 것이다. 민족사적, 문화사적, 문명사적 변곡점을 한참 지난 이 고색창연한 노래가 오늘에 범람하리라 보는 건 무리일까? 그건 12월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국인들이 당면한 세계인식의 심층에서 작렬할 문제의식이 여기에 있음은 밝히는 게 좋겠다.

 

「껍데기는 가라」의 정치적 감각이 얼마나 앞섰는지는 비유 언어의 시효성만 살펴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가령 ‘알맹이’와 ‘껍데기’, ‘흙가슴’과 ‘쇠붙이’는 오늘날에도 염원을 담아 통용되는 ‘한국인끼리만 통하는 말’의 대표적 용례에 속할 것이다. 외적 압력에 의해 격리당한 디아스포라의 기호로 사용되는 아사달 아사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모든 정치적 딜레마의 종착지로서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하는 장면은 한국현대사의 한 정점을 상징한다. 2019년에 과연 그러한 기적을 볼 수 있을까?

 

신동엽이 시를 발표했던 1960년대에도 발상이 파격적인 건 아니었다. 4·19 직후 중립화 통일의지를 전하고자 임진강을 헤엄쳐 월북을 시도한 자도 있었으니까. 신동엽이 「금강」 이후에 또 한편의 서사시로 쓰고자 했던 「임진강」은 어쩌면 그 일을 구상한 건지 모른다. 결국 신동엽의 빈 페이지가 된 「임진강」은 1980년대에 최두석 시인이 썼는데, 강을 헤엄쳐 건넜던 주인공 김낙중은 훗날 간첩죄로 옥살이를 한다. 그러나 냉전체제의 변경에 있는 남과 북이 중립의 완충지대에서 만나야 한다던 신동엽의 ‘중립화 통일론’은 수십년 동안의 정치적 긴장을 견디며 한국적 저항의지의 육체성을 담보했다.

 

그것을 줄기차게 붙들어 유효하게 만든 시인이 문익환이다. 문익환은 신동엽의 통일언어를 심화했을 뿐 아니라 이를 현실 공간에서 직접 실행에 옮긴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와 문익환의 「비무장지대」, 신동엽의 「술을 많이 마시고 난 어젯밤에는」과 문익환의 「꿈을 비는 마음」은 마치 하나의 영혼이 낳은 전편과 후편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1989년 방북 때 김일성 주석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집요하게 확인하는데, 나는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 2004)을 쓸 때는 거기에 담긴 진정성의 무게가 얼마나 엄중한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냥 하나의 사실로서 기록한바, 당시 문익환은 김주석도 중립화 통일론자임을 확인하는 순간 어찌나 기뻤는지 “통일은 됐어” 하고 외치고 싶었다고 방북 사건 「상고이유서」에 쓰고 있다. 그것이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6·15 정신’을 거쳐 ‘문재인·김정은 시대’로 계승된다. 한반도적 지성의 정수 하나가 이렇게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

 

생각해보면 우여곡절이 없는 염원은 없다. 베트남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회담이 결렬된 후 한반도의 대부분은 참담했을 것이다. 통일을 오직 정치적 사건으로만 아는 자들, 그래서 통일이 미래의 고향을 만들어가는 일이며 하나의 문화적 과정이어야 함을 몰각하는 대표적인 기제가 정계·관계·언론계 동향일 것이다. 한 시대의 정신사적 나태와 안정을 흔드는 창조적 도발이 사라지고 없는 오늘의 한국사회는 유사 이래 그 어느 때보다 낭비벽이 심하지만 온통 밥벌이 이야기로 시끄럽고, 국가의 평생교육체계가 촘촘하여 어느 때보다 많이 공부하지만 존재의 이해에 무능하다. 첨단 디지털 기기들은 만인을 만인의 적으로 몰아세우기에 바쁘다.

 

이토록 신령스럽지 못한 세계에서도 나는 여전히 소중한 ‘비상구’의 하나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로 본다.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의 근거로 들었던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을 다룬 서사시 「금강」은 반봉건·반외세만이 아니라 자연과 생명의 힘에 용해된 토착적 영성에 주목한다. 분단 이후의 한반도 정치체제는 심각한 정신사적 결여를 야기했지만, 나는 이 시에 그 영성이 살아 있다고 본다. 남과 북은 각각 자본주의적 근대와 사회주의적 근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영성적 요소를 공히 소진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점은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각지에서 추구된 해방사상의 미래와 우리의 미래를 격리시킨다.

 

통일은 문재인과 김정은과 트럼프의 일이 아니라 한반도에 형성된 생태공동체, 문화공동체의 주인들에게 필요한 일이며, 통일 의지 또한 신동엽이 ‘발’이라 하고 문익환이 ‘발바닥’이라 명명한 절대 다수 민중의 것이다. 나는 올해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신동엽 50주기를 기념이나 하듯이 「껍데기는 가라」가 SNS를 풍미할 것으로 보지만, 그래도 ‘민의 숨소리’가 사라진, 신동엽도 문익환도 없는 오늘의 서울이 자꾸 불안하기만 하다.

 

김형수 / 시인, 소설가

2019.4.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