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4‧11 워싱턴 한미정상회담, 다가오는 진실의 순간
최근 워싱턴에서 있었던 4·11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이 시점에 정상회담이 필요했느냐는 질문부터 성패 논쟁, 그리고 향후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 문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북미 “협상테이블은 살아 있다”, 실제로는?
하노이회담 결렬 이후 북미 양측의 수뇌부가 ‘협상테이블은 살아 있다’라고 반복적으로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는 미국 내 강경론의 득세를 북한이 맞받아칠 경우, ‘강대강’의 대결구조에 의해 프로세스 전체가 붕괴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강경론 확산에 제동을 걸고, 약해지는 대화의 동력을 회복하기 위해 회담을 추진했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자세 변화에 대한 일말의 여지를 확인했으며, 이후 4차 남북정상회담과 3차 북미정상회담으로 이어지는 협상의 로드맵을 한미가 공동 인식했다는 점은 분명 성과다. 특히 미국 내에서 꾸준히 비판을 받아온 톱다운 방식의 유지를 못 박은 점은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워싱턴 노딜’이라는 평가를 포함해 일각에서 제기되는 실패론에는 이번 정상회담의 정확한 성격과 목표에 대한 일정 정도의 오해가 있다. 이번 회담은 한미 간 담판이나 합의를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하노이 이후 대북정책에 대한 공동 준비였다는 점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의 빅딜 고수 및 제재 유지 등에서 감지된 양국의 차이는 현 상황에서 일시에, 그것도 공개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트럼프는 하노이회담 당시의 어려운 국내 입지가 상당 부분 해소되었고, 자신의 노딜 결단에 대한 미국 조야의 폭넓은 지지는 아마도 취임 이후 초유의 일인 만큼 당분간은 자기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고 싶을 것이다.
북한의 양보를 전제한 협상,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담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미 양국의 정상과 실무진이 나눈 총 116분간의 논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왔는지는 중요하다. 한국이 가진 중재안으로 어디까지 미국을 설득했느냐가 관건이다. 물론 대북 설득을 위한 복안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현시점에서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회담 직전 폼페이오가 제재에 대한 ‘작은 여지’를 원한다고 발언한 것이나, 회담 당일 트럼프의 스몰딜과 단계적 접근에 대한 언급들이 나쁜 신호는 아니다. 또한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의 시정연설에서 제3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한 용의를 밝힌 것에 대해, 트럼프가 트위터를 통해 환영의 메시지를 보낸 것도 긍정적이다. 그러나 엇갈린 메시지도 동시에 나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트럼프는 지난 15일에 대화는 좋지만 빨리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3차 정상회담이 북한의 양보 여부에 달려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빅딜 전까지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래서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다. 현 구도에서 섣부른 낙관은 물론이고 희망적 사고도 금물이다. 특히 북한의 전적 양보를 전제한 협상은 전혀 녹록하지 않다. 협상 전술의 한 측면이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미국이 강자의 일방적 횡포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의 시계를 싱가포르회담 전으로 되돌려버렸고, ‘선 비핵화 후 제재 해제’의 리비아모델로 돌아간 양상이다. 여기에 이라크 침공과 카다피 제거의 주역이었던 볼턴이 전면에 나선 상황에서 북한은 자신들의 생명줄인 핵을 더더욱 포기하기 어려워졌다. 북한이 굴복하면 다행이지만 하지 않더라도 조급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의 언급은 상당 부분 진실일 것이다. 게다가 미국의 강경한 참모들은 주고받는 협상을 통한 평화적 비핵화는 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북한 핵위협을 빌미로 한·미·일을 군사적으로 묶어 중국을 봉쇄하는 편이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어려워진 타협, 공개 행보를 줄여야 할 때
현재, 한국의 역할은 커졌으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미국이 결렬시킨 회담을 되살리려는 한국의 노력은 미국과 국내 보수강경파의 이른바 ‘김정은 수석대변인’ 프레임에 걸려 있다. 북미의 강대강 대치가 길어지면 비핵화와 적대관계 해소를 통한 체제보장의 교환은커녕 어떤 부분적 비가역적 조치조차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다. 미국 조야의 대북 불신 및 회의론이 임계점에 도달할 것이고, 북한도 오바마를 포기했던 전례처럼 트럼프를 회피한 채 장기전으로 돌아설 수 있다.
승부를 걸어야 할 이른바 ‘진실의 순간’(the moment of truth)이 다가오고 있다. 이 말은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가 검으로 소의 급소를 찔러 마무리 짓는 순간을 뜻하는 표현으로, 회피할 수 없는 결정적 운명의 순간을 지칭한다. 문재인-트럼프-김정은 정상들에 의한 초유의 톱다운프로세스가 2017년의 위기를 극복하고, 1년 남짓 평화를 향한 잰걸음을 해왔다. 변한 것은 많으나 정작 가시적으로 이룬 것은 부족하다. 약속과 합의는 많으나 실천된 것은 많지 않다. 트럼프도 김정은도 전술적인 측면에서 서두르지 않겠다고 하지만, 사실 시간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선거일정이 다가온다. 문재인정부의 지지율도 하락세를 보이고, 남북문제에의 올인은 추동력인 동시에 피로감이라는 양날의 검이다. 양보 없는 강자와 궁지에 몰린 약자 사이에서 더 늦기 전에 급소를 찌르는 결단의 순간이 필요하다.
시급하지만 조급함은 금물이다. 하노이에서 양쪽의 패가 공개됨으로써 협상이 쉬워진 것이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는지가 확실해졌다는 점에서 타협은 더욱 어려워졌기에 지금부터는 공개 행보를 줄이고, 물밑에서 북미를 오가는 치열한 외교전에 나서야 한다. 특히 칼자루를 쥔 미국을 설득해야 하는데, 지나친 친미일변도로는 설득하기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하고 때로 미국의 일방적 자세에 강하게 맞서야 한다.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김정은 위원장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향후 수개월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운명의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 국제정치
2019.4.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