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남자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다
지난해 말 리얼미터 정기 여론조사에서 20대 남성의 정권 및 여당 지지율이 최하위를 기록한 이후, 20대 남자는 정치계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이 강력한 반(反)페미니즘적 견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이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20대 남성에 대해 이루어진 복수의 조사에서, 최소 그들의 절반 정도가 반페미니즘 혹은 적대적 성차별주의를 갖고 있다고 나온다. 『시사IN』(통권 605호)에서는 자체조사를 통하여 ‘신념형’ 반페미니스트 그룹 25.9%를 포함하여 58.6%의 20대 남성이 반페미니즘에 동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개원 36주년 세미나를 위해 진행된 조사에서도 20대 남성 중 50.5%가 이런 유형에 속했다. 양쪽 모두 20대 남성의 반페미니즘은 윗세대 남성들보다 강하게 나타났다.
이 숫자에 당황하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특히 2015년 이후 성차별과 성폭력, 그리고 페미니즘은 “다이내믹코리아”에서 지속적으로 사회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 그 뜨거운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많은 청년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에 환멸마저 느끼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숫자들이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제대로 된 젠더교육도 성교육도 없이 온라인 커뮤니티나 친구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이 개인의 의식을 결정하고 있다. 페미니즘의 열풍은 뜨겁고 격렬하지만 최근 몇년간의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격렬한 현상이 그에 준하는 반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상식의 영역에 해당한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한국사회에서 성장해오면서 받은 교육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존재다. 그러니 특히나 기성세대의 일원이라면, 이들을 갑자기 나타난 괴물 보듯 하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이들의 등장에 필요한 전제들이 있다. 먼저 한국사회의 젠더의식은 사회적 합의의 수준에 도달한 것들이 거의 없고, 균등하지 않으며, 이 점은 교육제도나 국가, 정치의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이는 부모와 교사를 포함하여 성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들 역시 모두가 페미니스트인 것은 아니고,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도 각자 다르다.
이 혼란 속에서 도식적으로 진행되는 성평등 교육이나 성교육의 실효성을 찾기란 어렵다. 실제로 여러 조사에서 청년 남성들은 성평등 문제에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니라 자신들에 대한 차별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였다. 한편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함께 조사한 ‘2018 청소년 통계’에 따르면, 2013년 남성 청소년의 88.2%가 “남자와 여자는 모든 면에서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라는 주장에 동의했는데, 2017년에는 93.3%의 남성 청소년이 동의했다. 하지만 체감되는 남성 청소년들의 젠더의식은 더 악화되고 있다.
청년시기에 한정하면 한국의 남성들이 여성을 사회적 약자라고 인식하기 어려울 개연성이 존재한다. 『시사IN』의 조사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반페미니즘적 성향을 가진 20대 남성이 생각하는 생애주기별 남녀의 능력 차이였다. 이들은 교육과정·대학입시·취업시험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나다고 응답했으나, 취업 후 업무능력과 사회생활에서는 남성이 월등하게 뛰어나다고 응답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교육제도가 인재양성에 처참하게 실패하고 있다는 방증이겠으나, 막상 20대 남성이 얼마나 많은 직장 경험을 통해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지는 모호하다.1 다만 20대까지의 경험에서 대부분을 차지할 교육의 경험에서 동료 여성들의 성과가 더 뛰어나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의 양육 과정에서 주 양육자와 교사는 여성이었을 가능성이 높고,2 이들이 국가와 직접적으로 맞닿는 면 중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는 셧다운제를 주관하는 부처 역시 여성가족부다.3 즉 이들의 생애주기에서 여성은 양육자, 훈육자, 관리자, 국가권력이자 강력한 경쟁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성차별적 관습의 자장에 놓여 있다. 여자동료에게 지는 것을 더욱 나무라고 남성의 가능성과 의무를 과장하는 기성세대, 여성이 오로지 성적인 대상으로만 독해되는 온라인·또래 문화, 깊거나 만족스럽지 않은 여성과의 인간관계 혹은 연애경험 등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관점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또 자신의 경험과 처지가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되는, 어쩌면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을 ‘평범함’ 때문에 현실과 인식 사이의 괴리는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의 ‘박탈’로서 해석된다.
그런데 청년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은 여기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간 문제들과 결부되어 있다.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것은 청년 남성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전세계적인 경제적·사회적 변동과 맞물려 과거 흔들림 없는 주류였던 이들이 추락의 공포에 빠지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이들이 소수자의 정치를 모방하며 스스로를 피해자화하고, 차별 개선을 위한 조치를 역차별이라 몰아세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는 물론 불안정해지는 자신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이익 추구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자신이 소외되고 있다는 인식의 발로로도 볼 수 있다.
한국사회의 20대 여성들은 지난 수년간 펼쳐진 ‘페미니즘 리부트’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20대 남성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지난 10여년간 이어져온 청년 문제와 청년 담론은 남성 청년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그린 청년은 암울하고 변변찮은 존재들이었다. 오늘날의 글로벌한 질서에서 봐도 한국의 20대 남성이 기대받는 경우는 K-POP과 프로게이머 정도다. 즉 지금 주요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적 논의나 의제들에서 20대 남성이라는 정체성은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이는 당연한 이야기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20대 남성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반페미니즘은 그동안 부지런하게 페미니즘을 모방해왔다. 불매운동·민원·거리시위·청와대 청원 등의 방법들은 물론이고, 성평등 혹은 페미니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치나 이념을 날조하려는 시도도 벌였다. 가부장제를 지탱하던 기존의 기반들이 무너지고 여성들이 기존의 역할을 거부하는 혼란의 시기에, 변할 수도 변하지 않을 수도 없는 어정쩡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앞서가는 여성들의 그림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반페미니즘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은 거기에 어떠한 정당성이나 명분도 없다는 점이다. 개개인의 이익 추구가 최고의 선이 되는 시대가 왔다고 해도, 여전히 정치와 운동에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이념적 요소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심지어 적까지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반페미니즘이 의기소침해진 절반가량의 20대 남성들에게 잠깐의 도취감을 줄 순 있어도,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의 장에서 살아남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세계관에서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여성들은 더 이상 그런 식의 게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그야말로 ‘가망 없음’이다.
과거 메르스 갤러리에 올라온 여성들의 ‘미러링’은 패러디로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그 이유는 원본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선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페미니즘은 실질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패러디를 시도하고 있지만, 여전히 조악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원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페미니즘은 남자들에게 닥쳐온 혼란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지만, 그 길은 막혀 있고 어떠한 혼란도 잠재우지 못할 것이다. 남자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찰과 변화를 거부하는 그들 자신이다.
최태섭 / 문화평론가, 『한국, 남자』 저자
2019.5.8. ⓒ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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