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규모의 호크니
엄마랑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회(서울시립미술관 2019.3.22~8.4)에 갔다. 엄마는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그린 엄청나게 비싼 그림이 한국에 왔다고 들었으니 같이 보러 가자고 했다. ‘판타지 시’를 쓰는 아들의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
엄마는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의 줄이 길어서 놀라고, 그 긴 줄을 기다렸다가 순서에 맞춰 들어가야 해서 또 놀랐다.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왔구나. 오늘 들어갈 수나 있니? 이 정도는 많은 것도 아니에요. 예전에 다른 전시 보러 왔을 때는 세시간 기다려서 들어간 적도 있는 걸요. 그때는 줄이 저 건물 밖까지 있었어요. 미쳤지.
굳이 줄 서서 전부 다 보실 필요 없어요. 나는 저렇게 떠밀려서 보는 사람들 진짜 이해를 못하겠어, 그러면 뭐가 남아. 그냥 마음에 드는 거 몇개만 잘 보고 가면 되지. 쟤네 봐봐요. 저러고 밖에서 사진이나 몇장 찍고 가겠지.
그래도 엄마는 잘 모르니 줄 서서 다 봐야겠다.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첫번째 그림, 역원근법
엄마, 나는 이런 거 좋아. 이쯤부터 예술가들이 자기 눈에 보이는 모양을 믿지 않게 됐어요. 앞의 그림들이랑 또 다르잖아요. 이 그림은 역원근법의 영향을. 그러니까… 이 사람이 바보라서 이렇게 그린 게 아니라 일부러 그렸다는 거예요.
나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카메라랑 달리 사람의 눈은 쉴 새 없이 움직이니까 세상에 고정된 시점이란 건 실제로는 없다는 거예요. 원근법… 원근법은 아시죠? 그러니까 제 말은 엄마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풍경도 사실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 발명됐다는 거지. 그래서 나도 이상한 시를 써. 태평하게 쓰는 꼴 보면 열받고……
왜 사물을 있어야 할 위치에 그리지 않는 것이며 왜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 것일까? 탁자 위에 병들은 어째서 모서리에 위태롭게 쏠려 있으며 왜 색깔은 사물로부터 멋대로 탈출하는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지 않는다니…… 엄마한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두번째 그림, 가족
이 그림 좀 보렴. 너는 언제 엄마를 주제로 시 써줄래?
내가 아직 실력이 안 돼서 못 써요. 읽으나 마나 한 얘기만 하게 될까봐.
그리고 엄마는 다리가 아프다고 했다. 앉아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구성한 전람실은 막바지에야 있다. 그러니 앉아서 오래도록 볼 수 있는 그림도 막바지에야 있다. 뻔한 얘기만 하게 될까봐.
세번째 그림, 영상
나는 이 사람 작품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오늘도 그냥 그랬는데 맨 마지막에 있는 건 좋았어요. 영상이잖아요. 종이에 그린 게 아니라. 왜 안 돼? 그림을 종이에만 그리라는 법이 있나? 시대가 변하면 매체도 바뀌어야지. 매체가 변하면 양식도 바뀌고. 그런 거 보고 가상현실이라고 그러잖아요. 나는 가상이라는 말도 웃겨. 다 현실이지.
어쨌든 엄마, 유명한 사람이 그렸다 해도 모든 작품이 마음에 들 순 없어요. 큰 틀에서 봐야 해. 그 사람이 평생 뭐에 매달렸는지. 호크니는 내가 볼 때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보는 것에 배알이 꼴렸던 것 같아. 네가 믿고 보는 그게 뭐가 진실이냐고. 확신할 수 있냐고. 나도 그래요. 맞다, 그 병풍 같은 것도 좋았어요. 건방지잖아.
미술관을 나오고, 엄마는 마지막에 있던 커다란 나무 그림만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단지 그것이 거대했기 때문에.
네번째, 그리고 다섯번째의 커다란 그림
미술은 규모의 경험을 준다. 문학은 그것을 백배 확대해서 출력하더라도 내용이 백배로 확대되어 전달되지 않는다. 문학이 규모에 얽매이지 않아 내용을 자유로이 전승했다면 미술은 규모 또한 작품의 양식 하나를 이루어 우리에게 전한다. 호크니의 작품이 어떤 양식을 갖추었든 간에 엄마가 거대한 나무만을 기억하듯이. 혹은 모니터로만 모나리자를 본 사람이 그것이 실제로는 수많은 관객의 머리에 둘러싸여 손톱만 하게 보일 만큼 작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듯이.
나무 그림, 그거 보면 타일로 이어서 붙여놨잖아요. 우리 눈은 그 타일 하나 만큼밖에 못 본다는 말 같아요. 부분이 전체고,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풍경은 없다는 거지. 우리는 그걸 이어 붙여 떠올릴 뿐이고. 타일에 그린 미끈미끈한 느낌도 좋았어요.
나는 호크니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기야 할 것이다. 규모의 미술관에서.
그리고 그걸로 끝날 것이다. 처음으로 엄마랑 간 미술관에서 사진 한장 함께 안 찍은 오늘을 후회할 것이다. 사진은 남기지 않지만 이 기억은 오래 남는다. 규모의 사람들 안에서.
이 모두가 헛수고였다. 헛수고를 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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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Figures with Still Life」(1966~67), 525×456mm
그림 2. 「My Parents」(1937), 1829×1829mm
그림 3. 「In the Studio, December 2017」, 2781×7601×25mm
그림 4. 「Bigger Trees Near Water」(2007), 4600×12200mm
그림 5. 「Caribbean Tea Time」(1987), 2150×2900×540mm
류진 / 시 개발자
2019.5.1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