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응급실에서

정재민

정재민

야근을 하고 집에 가려고 자전거를 탔다. 한참 신나게 내달리다가 자전거가 돌부리에 걸리더니 내 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옆구리와 팔목이 너무 아팠다. 길을 지나던 사람의 부축을 받아서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어느 대학병원 분원의 응급실로 갔다. 백화점처럼 건물이 깔끔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내 팔 곳곳을 누르면서 아프냐고 물었다. 아플 때도 있었고 안 아플 때도 있었다. 의사는 그렇게 물으면서 금세 내 몸 곳곳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했으나 결론은 골절된 것 같지만 엑스레이를 찍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엑스레이를 찍으러 방사선실에 갔다. 방사선사가 촬영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나는 팔과 옆구리가 아파서 옷을 갈아입기 힘들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엑스레이 기계같이 투박한 말투로 그래도 정해진 대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다. 다친 왼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단추 하나 풀 수가 없었다. 아내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렸다가 아내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후 팔과 옆구리를 자세를 바꾸어가며 다각도로 엑스레이를 찍었다. 팔이 아파서 요구하는 자세를 취할 수 없다고 해도 그녀는 정해진 대로 찍어야 한다고 했다.

 

나와서 한참을 앉아 있는데 아무도 어딜 가라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이전 응급의학과 의사를 찾아갔더니 골절이라 이미 정형외과로 넘겼다고 했다. 다시 정형외과 앞에서 한시간이 넘도록 기다렸다. 그곳에는 20대로 보이는 남자 전공의(레지던트)와 인턴 둘이서 환자를 보고 있었다. 전공의는 목소리가 걸걸하고 태도에 거침이 없었다. 왠지 주눅이 들어 조심조심 묻는 할머니 환자에게 짜증을 내면서 “아, 그렇게 기다리면서 날밤을 까야 됩니다. 내가 지금 더 해줄 게 없어요”라고 했다. 아내는 그 말이 무례하다며 내게 귓속말로 흉을 보았으나 나는 아파서 대꾸를 못했다.

 

전공의는 인턴에게 지속적인 핀잔과 지적을 투척했다. 그것을 보고 아내가 다시 귓속말로 우리 아들은 의대를 보내면 안 되겠다고 했다. 나는 그 의사에게 치료받고 싶지 않아 이 병원을 떠나고 싶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비로소 뽀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솜털 같은 구레나룻이 난 인턴이 다가와서 캐스트를 하고 붕대를 감아주겠다고 했다. 인턴은 내 팔에 붕대를 감아놓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다시 풀기를 세번이나 반복했다. 그것을 본 전공의가 야단을 쳤고 인턴은 다시 붕대를 감으면서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로 “씨…”라는 욕설을 거듭 내뿜었다.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치료가 다 되기 전에는 갈 수 없다고 했다. 환자가 의사가 못 미더워서 가겠다는데 갈 수 없도록 하는 법적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신 전공의는 별안간 친절한 태도를 취하더니 캐스트를 한 손에 엑스레이 촬영만 하고 가라며 부탁 내지 사정을 했다.

 

방사선실에 갔더니 이전의 방사선사가 캐스트를 한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을 거듭 찍었다. 왜 오른손을 찍느냐고 물어보니 양손을 잘 비교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더 찍어야 하냐고 물으니 아직 많이 남았다고 했다. 황당해서 그만 찍겠다고 하자 방사선사가 어릴 적 드센 교사가 말 안 듣는 학생을 나무라는 태도로 대뜸 “환자!”라고 고함을 치며 앉으라고 소리쳤다. 전공의를 불렀더니 방사선사에게 왼손을 찍어야지 왜 오른손을 찍었냐고 나무랐다. 방사선사는 뾰족한 말투로 아까 전화로 오른손을 찍으라고 하지 않았냐며 따졌다. 전공의는 방사선사에게 오른손 촬영비는 ‘디씨’해주라고 했고 방사선사는 못한다고 버텼다. 두 사람은 그렇게 십여분을 싸웠다.

 

나는 무조건 가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전공의도 더이상 나를 막을 명분이 없었다. 대신 문제가 있어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그것을 써주고, 치료비를 15만원이나 주고, 마치 재난 현장을 벗어나듯 겨우 빠져나왔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그 병원 원무과에서 전화가 왔다. 잘못 찍은 오른손 엑스레이 촬영비 10,900원을 더 내달라는 것이다. 전화를 받지 않으니 문자로 돈을 내줄 것을 요구하면서 계좌번호까지 붙여서 왔다. 그런데 일주일 뒤에 믿을 만한 정형외과에 갔더니 손목이 크게 삐었을 뿐 팔에는 골절이 없다고 했다. 굳이 캐스트를 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믿기 어려워서 또다른 정형외과에 가서 또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똑같은 반응이었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 대학병원이라니.

 

한때는 우리 사회가 전문가를 신뢰했다. 전문가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덮어놓고 신뢰했다. 그것은 존경을 의미했다. 그래서 너도나도 자식은 전문가로 키우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도 나를 법률 전문가로 키웠다. 세상에서 신뢰받는 전문가가 많아지면 싸락눈이, 함박눈이 쌓이듯 이 사회 곳곳이 깨끗한 신뢰로 뒤덮일 것 같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문가들의 수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는데도 불신의 덩어리만 커졌다.

 

그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날마다 날아오는 문자메시지를 보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다가 옛날 판사 시절 내 법정에 재판 받으러 오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수그러들었다. 당사자들이 도저히 못하겠다고 신음하는 데도 판사인 내가 ‘정해진 대로’ 한답시고 무리하게 그들의 팔을 비틀고, 건들건들한 태도로 연로한 분들에게 무례하게 말하고, 가해자를 피해자로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고, 무죄를 선고해야 할 사람을 감옥에 가두고 감옥에 가야 할 사람을 풀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들은 돌아서자마자 한탄했을 것이다.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 법원이라니, 하면서.

 

정재민 /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저자

2019.5.2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