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멈추지 않는 행진곡
신용목의 시집 『나의 끝 거창』(현대문학 2019)은 자기 존재의 핵심이 걸려 있는 가장 결정적인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거창은 이 시인의 고향이지만 제목이 암시하듯 자신의 삶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밀려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거리는 일차적으로 세월의 힘이 원인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애써 피하고 싶은 시인의 어떤 무거운 마음이 빚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에는 꿈결 같은 기억의 파편이 어떤 이름들을 빌려 자리한다. ‘슬픈 줄도 모르고’ 세상과 부딪히며 멍든 삶을 키워나갔던 많은 친구들의 이름과, 화급하게 세상을 바꿀 무기로 쓰이길 바랐던 어떤 서적의 이름과, 사랑과 혁명과 노동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혔던 시간의 흔적이 그곳에서 시인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시인의 마음은 자신을 기다릴 저 목록을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이름들과 관련한 책임을 현재 자신의 삶이 잘 감당하고 있는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의 고통을 예측했다고 말을 바꿀 수도 있겠다. 이런 때 체념조의 가락은 회피의 구실이 되어주기도 한다. “역사의 비유는 늘 강물이더니/생활은 강변 주차장에 다 맡기고, 강물은 금영노래방 탬버린에서 떨어져 나온 징글들처럼/반짝일 뿐.”(「나의 끝 거창」)일상은 이제 변혁의 꿈과는 무관한 듯 비켜선 자리에 머물러 있고 역사에 대한 상상 역시 현실의 삶과는 거리를 둔 소품처럼 되어버렸다는 풍문은 헛헛하고 쓰라리다. 그러나 저 풍문이 전하는 감정적 동요는 그것이 우리가 잊고 있던 진실이어서가 아니라 그럴듯한 비유와 가락으로 어떤 사실들을 덮으려 한다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기에 발생한다.
다행히도 현실에 대한 약간의 음울함과 체념조가 확보한 시적 기운은 사실 이 시집에서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시집을 채우는 힘은 살아 있는 사람의 체념이 아니라, 사라졌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은 사람의 완고함에 기대어 있다. 시집에 등장하는 친구들의 이름은 대개 시인의 다정한 안부를 수신하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 내지 체념을 공유하지만, 학원자율화를 위해 투신했던 한 이름만은 그 감정의 상태로부터 벗어나 있다. 달리 표현하면 그 이름만은 여전히 굳세고 떳떳하여 시인은 물론이거니와 살아남은 자들을 아프게 한다. 저 굳센 기운을 시인은 때때로 돌멩이의 형상에 빗대어 그린다. 그리하여 이 시집에 실린 시에서 돌이 등장할 때마다 이상한 긴장감이 생긴다. 시인의 상상력은 돌을 빛나는 달로 품어내기도 하는데, 그것이 어둠 속에서도 잠기지 않는 눈의 이미지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체념으로 얼룩진 이곳이 잠시 정화되는 느낌까지도 받는다. 굳세고 또렷한 삶의 이름을 다루는 사이 거창은 이제 시인에게 자신의 삶에서 밀려난 끝 쪽이 아니라 자신이 가장 나중까지 지켜내야만 하는 공간으로 거듭난다.
이 거듭남 속에 시인이 우리에게 전하는 노래는 사실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낯선 무엇은 아니다. 시 속에 담긴 파도 소리와 달빛으로부터 가령 우리가 익히 아는 한 행진곡의 가사를 떠올리는 것도 가능하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던 다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던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의 소리 말이다. 시인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현실의 행진을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자는 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을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촛불을 켜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 속에서도 듣고, 노동하는 자의 존엄을 이야기하던 고공에서도 들었으며, 남과 북의 대표가 손잡고 만나 평화를 말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이 결국 시인의 시를 옛가락에 사로잡히는 것으로부터 구했을 것이다. 최근에도 이런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장면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에 18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했다. 누군가는 막무가내와 억지로 점철된 수구정당의 작태에 대한 분노가 빚어낸 단순 해프닝으로 여길 만하며, 또 누군가는 한 정당의 해산을 청와대에 청원하는 방식의 비합리성이 거슬리기도 하겠지만, 저 청원을 한 사람들이 실제로 청와대를 통해 그런 일이 가능하다 생각했을 가능성은 적다. 그들의 마음은 자유한국당 해산이라는 한정된 요구에 그치지 않을 것이며 거기에는 분명 또렷한 표현을 아직 얻지 못한 다양한 소망의 흔적들이 기입되어 있다. 이 소망이 오랫동안 쌓여온 폐단의 청산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즉 한국사회에 오래 지속돼온 어떤 문제적 흐름의 끝을 보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정당해산 청원의 형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저 문제적 흐름의 한 양상은 때만 되면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려는 목적에 자기 패거리 바깥의 존재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구태의 답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올봄에도 우리는 광주에 대해, 세월호에 대해 내뱉는 무책임하고 비윤리적인 발언들을 비참한 심정으로 들어야 했을 뿐 아니라, 분단상황을 이용한 종북프레임 같은 보수진영의 막무가내식 언어에 극심한 피로를 느껴야만 했다. 그런데 저 막말의 문제는 대다수가 공감하는 비윤리성과 억지스러움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들을 진정 분노하게 하는 연유에는 더 나은 현실에 대한 희망을 가로막고 동시에 변화를 거부하는 성격에서 비롯된 부분 역시 적지 않을 것이다.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의 표현’ 속에는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다양한 소망이 스며들었을 테지만, 그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꿈은 세상을 바꿔보자는 희망과 상상력이지 않겠는가. 더 나은 미래로의 변화를 목격하고 싶은 사람들의 창조적 상상력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서 작동 중이며, 그 힘은 다양한 모습의 변주를 통해 우리 곁을 늘 채우고 있다.
리베카 솔닛은 『어둠 속의 희망』(한국어 개정판 창비 2017)에서 희망을 말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고백한 바 있다. 희망보다는 결함과 문제를 말하고 음울한 세계관을 지속시킬 실패와 실망을 고집하는, 이른바 ‘절망하는 사람들의 절망에 대한 집착’이 생각보다 무척 깊다는 관찰은 인상적이다. 그리고 이같은 관찰은 촛불혁명 이후의 일상을 살아가며 사람들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냉소주의를 진단할 때도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신용목의 시집에 쓰인 언어와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을 요구하는 언어 속에서 나는 절망에 대한 집착보다 힘이 ‘쎈’ 변화에 대한 사실적인 욕망을 본다. 이 힘찬 욕망은 우리 곁에서 역사를 진전시키는 데 힘을 더해 더 나은 미래로 우리의 행진을 이끌 것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송종원 / 문학평론가
2019.5.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