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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의 과학에서 안전의 과학으로

강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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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산업안전연구원은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의 건강 데이터를 10년간 추적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20만명이 넘는 노동자들을 일반 국민 및 전체 근로자 집단과 비교해 암 발생 및 사망 위험비를 비교한 이 연구는 작업환경이 노동자들의 암 발병에 영향을 끼쳤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피해자들과 전문가·활동가들이 그동안 한결같이 주장해온 바가 정부기관의 연구로 확인된 것이다. 같은 날, 검찰은 1994년 서울대 수의학과 이영순 교수팀이 작성한 가습기살균제 흡입 독성에 대한 연구 보고서를 숨겨온 혐의로 박철 SK케미칼 부사장과 SK케미칼, SK이노베이션 회사 법인을 16일에 기소했다. 이는 거짓된 증거를 제시하거나 허위로 진술했을 시 처벌한다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의 조항을 적용한 첫 기소 사례다.

 

삼성 백혈병 사건과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과학이 생각보다 약한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과학은 기업의 영향력에 힘없이 흔들렸다. 삼성의 의뢰를 받아 ‘삼성전자 작업장 환경은 안전하며 발병 사례 조사 결과 업무 연관성은 없다’는 평가 결과를 내놓은 인바이론(Environ)이 담배회사의 편에서 흡연과 암 발병 사이의 관계가 희박하다고 주장하는 컨설팅 업체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는 몇몇 과학자들이 기업의 의뢰를 받은 독성 평가 보고서를 조작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서울대 수의학과 조명행 교수는 옥시에서 의뢰받은 독성 평가 실험 데이터를 조작하거나, 임신한 동물 실험 결과를 보고서에서 제외하는 등 연구결과를 조작하여 현재 대법원 재판이 진행 중이다.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 재판부는 일부 실험 결과를 삭제한 것은 과학자의 재량으로 보고 이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연구비를 편취한 혐의만 유죄로 인정되었다). 최근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는 조명행 교수팀의 연구를 심각한 연구부정행위로 보고 2심 결과를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조사보고서를 낸 바 있어, 대법원에서 판결이 바뀔지 주목되는 상황이다. 기업이 의뢰하는 용역연구를 수행하는 핵심 주체가 대학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가습기살균제 사례는 과학연구를 둘러싼 정치경제적 구조가 안전의 과학을 더 취약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과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복잡한 관료조직과 법망, 잘게 쪼개진 역할 분담 속에서 여기저기 흩어지기도 했다. 서울대 홍성욱 교수는 2018년 『과학기술학연구』에 발표한 논문에서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시스템의 붕괴와 같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정부와 기업의 일상(routine)적인 활동 속에서 위험의 징후를 포착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유독성을 가진 제품이 아무런 문제 없이 출시되어 시장에서 오랫동안 판매될 수 있었던 것은 비단 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비윤리적인 행동이나 안전 문제에 철저히 대응하지 못한 정부기관의 무능이 낳은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촘촘하지 못한 정부 부처 간 역할 분담, 그리고 기업 내 규제 부서의 역할 축소 등으로 인해 화학제품의 위험과 안전을 평가하는 과학은 제품 개발·허가·제조·유통의 긴 과정 가운데 어디에서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학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공장 안에서 한순간에 무력해지기도 했다. 산업안전연구원의 연구결과를 보도한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보고서에는 반도체공장 노동환경에 대한 증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스무살, 오퍼레이터로 입사한 지 2년 만에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린 여성은 “3라인 아래층에는 수많은 낡은 배관이 지나가고 있어서 케미컬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상황이었고 사고 발생 시에는 대피는커녕 현장노동자들이 직접 화학물질 등을 손으로 걸레질하여 치웠”다고 증언했다. 공정 엔지니어로 입사한 지 7년째이자 서른살이 되던 해 급성림프구성백혈병을 진단받은 남성은 인터락이라는 설비 안전장치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이러한 안전장치라 해도 살인적인 생산물량 때문에 작동하지 않고 해지해 놓은 상태에서 작업하는 것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작업형태”임을 증언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조각조각 쌓아올린 안전의 과학은 안전규정이 무시되거나, 생산의 압력이 거세거나, 혹은 하청과 재하청의 복잡한 노동구조 속에서 더 부실한 안전망 속 노동자들이 더 위험한 일자리로 몰릴 때 한순간에 힘을 잃을 수도 있다.

 

우리는 두 사건을 통해서 과학이 쉽게 흔들리고, 수행되지 못하고, 무력해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것은 위험과 안전의 과학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의 암과 작업환경의 인과관계를 확인하는 데 10년간의 추적조사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굳건한 과학을 만들기 위해서 종종 장기간의 꾸준하고 끈기있는 연구가 필요함을 새삼 일깨워준다. 이런 과학은 마침내 그 결과가 밝혀졌을 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묵묵히 뒷받침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한가지 고민할 것은 언제나 잘 확립된 과학을 기다리기에는 당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은 과학적 연구와 정책적 의사결정은 “별개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분명한 인과성과 기전을 탐구하는 것은 과학의 마땅한 소명이지만, 사회정책과 규제는 과학의 원칙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시사IN』 통권 608호) 가습기살균제나 반도체공장에서 사용되는 수백가지 화학물질들과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가 상세히 밝혀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한발 앞서 포괄적이고 두터운 피해보상제도나 산재보상제도를 마련하자는 사회적 합의로 나아가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증거기반 정책은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중요하지만, 이 원칙이 언제나 사회를 더 정의롭고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연실 / 과학기술정책학 박사

2019.5.29.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