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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가 된 사제, 그의 정원에서

이향규

이향규

금요일 오후, 동서울발 양구행 고속버스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부대로 복귀하는 군인이다. 신남터미널에 내리니 승합차가 기다리고 있다. 승합차 옆구리에 ‘겟세마니 피정의 집’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정’은 꼭 삼십년 만이다. 피세정념(避世靜念). 세상사로부터 떨어져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집중작업’을 하겠다는 각오로 이곳에 왔다. 글이 잘 안 풀렸다.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무겁고 어렵다. 마감은 다가오는데 생각이 엉켜서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매일매일을 번잡하게 낭비했다. 그래서 컴퓨터와 책과 자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도시를 떠났다.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이 책을 읽을 일도 없었다. 『기나긴 겨울: 한 선교 사제의 한국전쟁 포로 수기』(가톨릭출판사 2003). 지은이는 필립 크로스비(한국이름 조선희, 1915~2005) 신부다. 사무실 유리창에 책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한권 샀다. 그는 이 피정의 집을 만든 신부란다. 뒷장에 적힌 저자의 연보부터 읽어보았다.

 

그는 호주에서 태어났는데 삶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냈다. 스물다섯살에 한국에 와서 여든셋에 돌아갔다. 홍천, 포천, 간성, 원통, 신남성당에서 사제로 일했다. 홍천본당 주임신부 시절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다른 성직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책은 1950년 7월 체포되어 1953년 5월 석방될 때까지 3년간의 기록이다. 1955년에 아일랜드에서 출판되었고 2003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우연히 또 만나게 된 전쟁 기록. 이번에는 사제의 눈으로 본다.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나는 그날에 일어난 사건들을 잊을 수 없다. 그날 새벽에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 나는 갑자기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 나는 가장 인정머리 없는 적의 포로가 되어, 낯선 사람들로 꽉 들어찬 공동체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게 되었다. 공통점도 별로 없는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가정에서조차 하기 힘든 친밀한 생활을 하도록 내몰려 당황해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소름끼치는 죽음의 행진을 견뎌 내야 했으며,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동안 이곳저곳으로 끌려다녀야 했다. 나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아픔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고약했던 것은 사제에게 영적 원기 회복의 샘이 되는 아침 미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것이고, 포로가 된 한 사제가 줄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에게 사실상 아무런 영적 도움을 주지 못함으로써 마음과 영혼이 서서히 굶주려 가는 고통이었다.(17~18면)

 

전쟁이 난 날, 그는 춘천에 있었다. 전쟁의 회오리는 38선이 가까운 그곳 사람들에게 먼저 닥쳤다. 요란한 대포소리와 맹렬한 기관총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은 그날로 피난길에 올랐다. 짐을 이고 지고 집을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을 그는 이렇게 기록한다.

 

이들은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고 보통 그렇게 살았었다. 참을성 있고 온순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이들은 고된 인생의 짐을 가볍게 여기고 지냈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에게서 쾌활한 기색이 사라졌고 얼굴엔 긴장과 수심이 가득했다. 어떤 사람들은 친척이나 친구 집에서 피난처를 구하게 되겠지만, 대부분은 오늘 밤 어디서 잠을 자게 될지 모르고 있었다. 가진 식량이 떨어지고 나면 무엇을 먹을지도 몰랐다. 가족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부모를 놓쳐버린 아이들은 슬피 울부짖었고, 당황한 부모들은 애타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떼 지어 몰려드는 이 수많은 군중은 어젯밤도 평소와 다름없이 투박하게 지은 조그마한 자기 집 방바닥에 드러누워 잠을 자면서, 오늘 아침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잠을 깰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 그런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라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되었고, 단조롭지만 평화로웠던 일생생활은 별안간 박살이 나 있었다. 집을 잃고 두려움에 싸여 어쩔 줄 모르면서 이들은 몇 달, 몇 년간 계속될 호된 시련의 시작일 뿐인 오늘을 맞이하고 있었다.(20~21면)

 

평화로운 일상이 오늘 아침에 별안간 박살 난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오늘이 어제와 다르지 않고 내일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인민군은 곧 홍천을 접수하고 성당을 몰수했다. 그는 춘천으로 호송되고 그후 서울로 이송되었다. 서울에서는 다른 민간인 포로들을 만났다. 가톨릭, 성공회, 구세군, 감리교 선교사와 외국 공사, 기자 등 수십명이 모였다. 이즈음 유엔군 참전소식이 들렸고, 그들은 석방의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유엔군의 진격에 따라 포로들은 점점 더 북쪽으로 이송되었다. 평양을 거쳐 북쪽 끝 만포에 도착했다. 만포에서는 미군포로들도 합류했다.

 

그들은 만포에서 중강진까지 160킬로미터를 걷게 된다. 그는 이것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불렀다. 11월이었고, 옷과 신발은 변변치 않았고, 산길은 험난했다. 칠팔십대 노인과 여성도 많았다. 모두 이미 영양실조로 쇠약해져 있었다. 시작부터 불길했다.

 

“그들에게 행진을 시키면 죽을 것입니다.” 통역을 맡은 구세군 영국인이 말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행진을 시키시오! 그게 군의 명령이오.” 포로들이 ‘호랑이’라고 불렀던 인민군 소좌가 말했다. ‘호랑이’는 행진 도중 대열에 낙오되는 자는 사망자와 함께 버려두었고, 대열에 처지는 동료를 도와주는 미군을 총살했다. 여드레 만에 중강진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압록강변에서 세번의 겨울을 지내고 1953년 5월 25일 석방되었다. 그가 기록한 전쟁은 잔혹하다. 그건 이 짧은 지면에 다 적을 수가 없다. 전쟁은 공평하게 가혹했다. 석방을 앞두고 평양으로 후송되었을 당시 만난 북한군 장교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평양에서 나를 담당했던 대좌는 광적인 공산주의자였지만 성실했으며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사실 북한 사람들은, 잔학한 짓을 했고 그중 몇 가지는 이미 이야기했다. 그러나 북한사람들만 그런 짓을 했는가? 그 대좌는 나한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나는 그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유엔군이 처음 진격했다가 후퇴한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밀폐된 방공호 안에서 600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모두가 공산당의 친척들이었는데, 그중 한 구는 그의 어머니 시신이었다.(300면)

 

그는 단둥에서 소련 관료에게 인계된다. 그리고 중국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에서 호주대사관에 인계되었다. 자유를 얻었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일상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 이곳은 뜨거운 물과 비누와 깨끗한 내의가 풍부하다. 음식도 좋아서 배가 고프지 않은 사람들도 먹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나에게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이런 소박한 것들이 무수히 많은 곳으로 나는 돌아왔다. (…) 나는 또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국가의 공익을 제공하는 법의 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가 법을 지키기만 하면 어디든지 오갈 수 있는 땅으로 돌아왔다. 그곳은 책과 신문이 자유로이 발행되고 내가 그것을 자유로이 읽을 수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는 내가 비판할 권리를 갖고 있고, 개혁의 방법이 평화적이기만 하면 내가 바라는 어떤 개혁도 주장할 수 있는 곳이다. (…) 나는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고 귀중한 자유를 얻었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을 자유고, 나의 신앙을 공공연히 고백할 자유다. (…) 살아서 우리와 함께 이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안식을 찾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우리가 모두, 살아남은 사람과 살아남지 못한 사람, 잡힌 사람과 잡은 사람, 그들의 간수, 그들의 우상, 그들의 ‘호랑이’도 그분과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마지막 날에는 우리 중 아무도 그분을 뵙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하여 주소서!(301~302면)

 

그가 다시 얻게 되어 깊이 감사했던 것 가운데 지금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너무 오랫동안 당연히 누리고 있어서 특별하지도 않다. 그가 살아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좋은 것들을 충분히 누리십시오. 평화를 빕니다.’

 

이향규 /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연구교수

2019.6.26.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