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영변 플러스 알파’에서 ‘하노이 플러스 알파’로
지난 6월 30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극적인 판문점회동으로 비핵화 협상이 다시 본격화될 전망이다. 새로운 협상이 지금까지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한반도평화프로세스를 진전시킬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판문점회동은 북미 정상의 협상에 대한 의지를 확인시켜주었지만, 이 회동에서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한 논의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회동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나 실제 만난 시간 등을 고려할 때 상대가 바라는 문제에 대한 원칙적 언급은 있었겠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한 구체적인 논의까지 진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실무협상에서 해결되어야 할 문제다.
일단 판문점회동 후 트럼프를 포함한 미국 측 주요 인사들이 단계적 접근을 포함한 유연한 접근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발언을 이어간 점이 협상의 돌파구 형성 가능성을 기대하게 한다. 트럼프는 회동 직후 “제재는 유지되지만, 협상의 어느 시점에 어떤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판문점회동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북이 핵 동결을 한다면 제재를 완화할 수는 없지만 인도적 지원, 외교관계 개선 등 다른 양보를 할 수 있”으며 비핵화 목표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주고받기”(give and take)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비건의 발언을 근거로 트럼프 행정부가 최근 ‘핵 동결’로 목표를 조정했다는 추측들이 이어진 바 있는데, 위의 발언 역시 비핵화를 최종목표로 강조했다는 점에서 과잉해석이다. 이러한 과잉해석은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려운데 미국 내에서 단계적 해법에 대한 부정적 생각 혹은 선비핵화론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준다. 이는 당장 북한의 모든 핵무기를 제거하지 못하는 방안은 북의 핵보유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식의 일방적이고 비현실적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 접근법, 즉 주고받기를 통해 신뢰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비핵화가 이뤄질 것이라 보기를 거부하는 접근법이 지금까지 대북협상을 실패하게 만든, 그리고 북의 핵능력 강화를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다. 트럼프 행정부는 하노이회담이 ‘노딜’로 끝난 이후 이러한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한 듯하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북한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가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이후 협상에 긍정적 신호다. 필자가 보기에 비교적 분명한 변화의 신호는 5월 21일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핵 시설 한두곳을 없애는 제안을 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곳도 더 없애라고 요구해서 협상이 타결되지 못했다”고 설명한 것이다. 북한이 강한 거부감을 표하는 ‘핵시설 신고’나 ‘핵폐기 일정표 제시’ 등을 당장의 협상의제로 내세우지 않고 핵시설 폐기의 규모를 제기한 것인데 이는 북한과 협상의 여지를 넓힐 수 있다. 이 발언에 대한 직접적 반응으로 보기는 힘들지만 북한 입장을 대변하는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6월 1일 “제시된 시한 내에 미국이 건설적인 방안을 가지고 나온다면 조선도 그에 상응하게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점도 판문점회동으로 가는 길을 암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문제가 한번에 해결되기는 어렵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진행과정에서 새로운 우여곡절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새로 시작되는 북미협상은 향후 평화 프로세스의 경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현재 협상의 진전과 관련해 두가지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다. 첫째는 서로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를 뒤로 돌리고 쉬운 문제부터 풀어가는 ‘하노이 이전’(before-Hanoi) 방안이다. 북의 영변 지역을 중심으로 핵 동결과 폐기를 진행하고 미국은 인도적 지원, 외교관계 개선, 종전선언 등을 내어주는 것으로 비핵화 프로세스를 출발시키는 방안으로 하노이 회담 이전에 관련국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바 있다. 여기에는 비핵화 프로세스의 동력을 유지하고 남북관계 진전에도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이 영변 밖의 핵시설에 대한 의구심을 강하게 제기하는 상황에서 북의 비핵화에 대한 회의론을 증가시키고 이후 협상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하노이 플러스 알파’(Hanoi plus alpha) 방안이 더 바람직하다. 북이 영변 외 시설을 협상 의제에 올리되(이른바 ‘영변 플러스 알파’), 그에 그치지 말고 미국 역시 제제 완화를 포함한 더 적극적인 상응조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전자만 요구해서는 협상이 진전되기 어렵다. 물론 아직 북미 양측이 이러한 양보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 방안이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회의론을 잠재우고 신뢰 증진과 추후 비핵화를 위한 동력을 강화하는 데도 훨씬 유리하다.
만약 내년 상반기까지 ‘하노이 플로스 알파’ 방향으로 협상이 진전된다면 한반도평화프로세스는 역진(逆進)이 어려운 지점을 지날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북미 사이의 입장 차이가 존재하고, 장애물에 직면한 이후 긍정적 분위기가 급변하는 상황을 이미 여러번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가 협상 진전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이번 판문점회동과 관련해 한국정부가 구경꾼으로 전락했다는 일부의 비판도 있지만 4월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의 한국 방문을 확정하지 못했으면 판문점회동 자체가 성립될 수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작년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있었고 그 경험이 공유되었기 때문에 트럼프가 한국 방문 시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만날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작년 4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사태를 다소 낙관하고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진전시킬 기회를 놓쳤던 우를 범한 바 있지만,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일 의지를 다져 ‘하노이 플러스 알파’를 실현시키기 위한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다음달 광복절까지 한국정부의 움직임이 주목되는 이유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2019.7.1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