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여름의 호흡: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1 : 절필시대」
해가 저문다. 아직 놀이를 끝내지 못한 아이의 그림자가 놀이터를 서성이고, 아주 가끔 어떤 그림자는 아이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림자를 잃고 흔들림도 설렘도 울음도 잃은 채 무럭무럭 자란 아이는 그때처럼 저물어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언제부턴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던 그림자의 윤곽을 모래밭에 그려보지만, 이어붙인 선은 그대로 남아 그림자의 부재만을 증명할 뿐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아이도, 아이가 남겨놓은 그림자의 윤곽도 모래알처럼 부서지고 흩어지고 나서야, 화석처럼 남은 아이의 그림자가 그때의 모습 그대로 돌아와 이미 없는 아이와 아이의 집을 찾아 묻는다. 찾아질 리 없는 아이와 아이의 집을 그림자와 함께 걸으며 그림자가 되어가는 시간. 그렇게 오래 아득한 침묵 속에 떨어져 그림자의 시간을 살아내고 다시 돌아온다. 그 현기증의 무게로 그림자를 어루만지고 끌어안는다.
「근대미술가의 재발견1: 절필시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2019.5.30~9.15)는 개인적 이유로든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든 작품세계를 이어가지 못하고 대중들에게 잊힌 근대미술가 6명(정찬영, 백윤문, 정종여, 임군홍, 이규상, 정규)의 삶과 작품을 다루고 있다. 미술사는커녕, 근대미술을 이끈 주요 작가들의 작품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에게도 이 전시는 남다르게 다가왔는데, 붓을 꺾는다는 일의 무게감을 어쩌면 조금은 이해하게 된 근 일년간의 경험들 덕분이었을 것이다. 원고청탁을 받고 매번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할 때마다 대상으로 삼은 시와 소설들에 죄를 짓는다는 기분으로 휘청였고, 절필은 자의든 타의든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구체적 사실의 부피와 무게로 찾아왔다. 부족한 글이나마 발표할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고 늘 스스로를 다독이며 버티고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과연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 언제까지 견뎌낼 수 있을지 풀리지 않는 문장들 속에서 자주 넘어졌다.
이번 전시에서 기억상실증으로 35년간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 나이 칠순을 넘기고서야 회복되어 생의 마지막 2년을 오로지 작품활동에만 매달렸던 백윤문(1906~79)의 이야기는 그의 어떤 작품보다도 더 작품 같았고, 오래도록 캄캄한 적막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가장 왕성한 활동을 이어갈 서른일곱의 나이에 자신이 해온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알던 모든 사람과 그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유폐된 채 텅 빈 몸 안에 갇혀 하루하루 희미해져갔을 시간의 무게를 상상했고, 그 아득한 거리에서 점점 멀어져가기만 하던, 한때는 그 무엇보다 선명했던 삶의 순간들을 그의 그림 위에 겹쳐 보았다.
백윤문은 1930년대에, 일본이 주도했던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수상하며 두각을 나타냈던 수묵채색화가로, 주로 화조화와 인물화, 산수화에서 업적을 남겼다. 기억상실증 이상의 설명은 들을 수 없어, 어떻게 갑자기 그런 병마가 찾아왔고 또 어떤 이유로 불현듯 35년 만에 회복되어 생을 마치기까지의 2년을 미친 듯 그림만 그리다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72세의 노인의 몸으로 깨어난 서른일곱의 백윤문은 치밀하고 장식적이던 과거의 화풍을 버리고 여백이 강조된 고요하고도 담담한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마치 잠들어 있던 지난 세월을 모두 보상받으려는 듯, 지난 35년간 그저 먼 곳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꿈의 풍경들이 사라질까 두려웠던 듯 그는 기적처럼 기억을 회복하자마자 하루 종일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고, 1년여의 노력 끝에 재기전을 개최했지만, 그다음 해인 1979년에 워싱턴에서의 개인전을 준비하다 돌연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보면 6명 중에서도 유독 백윤문의 전시가 기억에 남는 건, 오직 그에게만 ‘재기’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최초 여성 특선 작가였지만 화가의 길을 접고 주부로서 살아야 했던 정찬영(1906~88)에게도,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더이상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던 임군홍(1912~79)에게도, 정신질환 등 개인적인 이유로 작품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절명한 이규상(1918~67)에게도 그런 드라마틱한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월북 이후 북한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지만 그로 인해 남한에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정종여(1914~84)나 판화와 현대 도자 개척에 몰두하면서 화가로서의 위상은 잃어버렸지만 말년까지도 작품활동을 할 수 있었던 정규(1923~71)의 삶은 오히려 행복해 보였고, ‘절필’이라는 말로 손쉽게 묶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물론 ‘미완의 세계’를 낳게 한, 시대를 성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시회 제목이기도 한 ‘절필시대’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작가마다 경험했던 절필의 굴곡과 무게감은 사뭇 달라 보였고 그래서 더 깊이 그들이 남긴 그림자들을 응시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하고, 조바심치고, 두려워해도 ‘절필’의 순간은 온다. 더는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여 심장이 찢어지든, 그래도 지금껏 견뎌온 시간의 밀도에 만족하며 자신을 뒤흔들던 계절들을 떠나보내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놀이는 끝이 나고 돌아가야 하는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 돌아서는 발걸음이 못내 아쉬워 이미 해가 진 어두컴컴한 놀이터에 홀로 남은 그림자를 발견할 때면, 어쩌면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절필의 육신에도 한순간 뜨거운 피가 돌 것만 같아 정처 없이 그림자와 동행하기도 했다.
「절필시대」를 통과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7월의 여름날은 여전히 덥고, 가는 비가 내렸고, 우산을 쓰고 몸을 움츠려도 온몸이 젖기만 했다. 단 한번의 방심에도 실족을 했으며,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또 한번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시간으로부터도 유배된 꿈들의 눈빛과 여전히 오지 않은 재기의 열망 사이에서 휘청이며 여름을, 언제나 반쯤은 시큼한 부패의 냄새를 풍기던 여름날의 뜨거운 절망과 희망을 깊게 들이쉬곤 잠시 멈추어보았다.
이철주 / 문학평론가
2019.8.1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