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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를 넘어: 故 이용마와 언론개혁

민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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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전 9시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 故 이용마 기자의 시민사회장 영결식이 진행됐다. ‘많은 언론인’이 함께했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필자 역시 그중 한명이었다.

 

이용마 기자와의 인연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른다.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만 하고 있다. 당시 필자는 미디어오늘 초년생 기자였다. MBC를 출입하게 되면서 인사차 방문한 여의도 MBC 보도국에서 명함을 주고받았던 기억만 흐릿하게 남아 있다. 연차가 낮은 신입 기자에게 이용마 기자가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건 그가 외부보다 더 신랄하게 MBC 뉴스를 비판했을 때였다. 그는 기득권화하기 시작한 기자들에게 비판적이었다. 대기업에 편향적인 한국 주류언론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했다. 언론계 상황을 잘 몰랐던 햇병아리 기자에게 이용마 기자는 좋은 취재원이자 훌륭한 선배였다. 그는 필자에게 언론계 길잡이 역할을 해준 몇 안 되는 롤모델 중 하나였다. 끝내 이 말을 전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용마 기자 별세 소식이 알려진 후 소셜미디어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언론인 중에는 개인적 인연을 언급하며 ‘잊지 않겠다’ 다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용마 기자 영결식을 보도한 많은 언론들은 그를 ‘참언론인’ ‘추모’라는 키워드로 애도했다. 고인을 존경했던 후배 입장에서 이런 추모 열기는 고맙지만 동시에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추모 속에 정작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그의 메시지가 가려지는 건 아닌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고인이 이루지 못한 언론개혁은 여전히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이용마 기자는 어떤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을까. 재작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권력에 대한 날 세운 비판은 많이 했던 것 같은데, 약자를 위한 대변은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요. 기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센 놈을 조져야 센 기자’라고 해요. 스스로 ‘센 기자’가 되기 위해서 더 강한 권력을 비판하려는 경향이 있죠. 저도 권력을 쫓아다니는 행태를 자주 보였던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많이 잊혔죠. 굉장한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해요.”(2017.6.12)

 

필자가 기억하기로 속 이용마 기자는 MBC에서 해고된 이후 우리 사회 엘리트들에 대한 비판에 무게중심을 둔 것 같다. 특히 언론이 기득권에서 벗어나 어떻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언론이 소수 권력자에 대해선 엄격한 시각을 유지해야 하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해선 인간적인 배려가 필요하다는 점을 여러번 강조했다. 이게 바로 필자가 기억하는 이용마 기자의 ‘공정성’이다. 그는 한국 언론에 팽배해 있는 엘리트주의에 비판적이었으며 ‘객관성’과 ‘기계적 중립’의 관행에서도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용마 기자가 국민대리인단을 통한 공영방송 사장 선출을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국민대리인단 제도는 성별, 연령별, 지역별, 학력별 비례 등을 고려해 무작위 추첨을 하고 여야 대표들이 이들을 면접한 뒤 최종적으로 구성된 국민대리인단이 사장을 선출하는 방식이다. 현재 대통령과 정치권이 공영방송 이사들을 추천하고 이들을 통해 사장을 뽑는 방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용마 기자는 국민대리인단이 엘리트주의를 넘어 국민들이 직접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획기적인 제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또한 공영방송 사장을 비롯해 권력기관 장들을 이런 방식으로 뽑는다면 권력기관들이 정치권이나 특정 정치세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여지가 많다고 봤다. 편파시비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각에선 그의 주장을 이상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편파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야 추천 이사제도의 대안으로 충분히 검토해볼 가치는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문제는 한국 언론이다. 한국 주류 언론은 여전히 과거의 관행과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공영방송 사장은 물론 국민에게 권력기관장을 선출하게 하는 방식에 대해 부정적이다. 뿌리 깊은 엘리트의식 탓이다. 이뿐인가. 여전히 출입처 중심의 취재환경을 고집하며 여야의 주장을 나란히 배치하는 걸 ‘정치보도의 공정성’이라 여기고 있다. 노동자가 파업하면 ‘국가경제 타격’ ‘불법 파업’ 등과 같은 헤드라인으로 호통부터 치는 게 한국 주류언론이다. 이런 관행과 관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이용마 기자를 추모만 한다고 한국 언론이 변화할까. 불가능하다. 제도 개선 못지않게 언론인 스스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고 이를 바꾸려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다. 일상이 된 과거와의 관행에서 탈피하지 않는다면 언론개혁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2019년 현재 한국 언론은 자기혁신에 너무 게으르고 변화에 대해서도 둔감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엘리트는 과연 누가 개혁해야 하는가.” 이용마 기자는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창비 2017)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답은 “국민이 엘리트를 개혁해야 한다”였다. “폐쇄적인 엘리트를 뛰어넘으려면 대중의 집합적인 지혜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필자는 이용마 기자가 언급한 ‘개혁 대상 엘리트’에 당연히 한국의 주류 언론도 포함된다고 본다. 추모를 넘어 그가 바꾸고자 한 세상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민동기 / 고발뉴스 미디어전문기자,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 

2019.8.2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