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음하는 국토에서 생명이 환호하는 국토로: 故 조태일 시인 20주기와 조태일문학상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
때 찌든 삼베치마 앞에서 털 앞에서
땀나는 가슴 앞에서 콩크리트 앞에서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
1978년 명동 YWCA 문학강연에서 조태일 시인이 낭송한 시 「참외」의 일부분이다. 이 시에는 ‘저항’이라는 노골적인 단어가 두번, ‘주먹’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오며 ‘불끈 쥐고’라는 시어 역시 두번 나온다. ‘자유’ ‘민주’라는 단어도 직접 등장한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명동 문학강연에 그를 따라다녔다. 감시의 눈초리가 매섭기만 한 강연장 안은 입추의 여지 없이 꽉 들어찼으며 조직은 미약하나 서로의 눈을 믿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80년대까지의 문학은 독재에 맞서 싸우는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선봉장이었다. 조태일 시인은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아침선박」이 당선되며 등단하였는데 1970년 두번째 시집 『식칼론』부터 민주주의를 향한 굳건하고도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은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식칼론』은 자신이 운영하던 시인사에서 발간하였는데 여기서부터 우화를 마친 매미처럼 식칼이라는 이롭고도 무서운 각성으로 밖과 자신을 들여다본 것이다.
1990년대 초 나는 조태일 시인에게 이끌려 매주 일요일 북한산을 오르는 ‘거시기산악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이 산악회는 자신에게 결코 이로울 수 없는 민주화운동 1세대 선생님들의 주말 나들이 모임이었다. 당시에는 국립공원 북한산에서 국도 끓여먹고 술도 많이 마시던 시절이라 술심부름을 할 젊은이가 필요해서 나를 산악회에 끌어들였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70년대 중반부터 만나기 시작한 조태일 시인은 나의 스승 역할을 하신 셈인데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순수함과 소박함을 평생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의 시적 저항은 술수와 계산이 없는 이런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것이든 털끝만큼이라도 빚을 지면 견딜 수 없는 그였기에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자들 앞에 육중히 일어서던 조태일 시인의 시는 여기에서 과묵하게 출발한다. 우리는 그를 ‘국토의 시인 조태일’ 이렇게 부른다. 『국토』는 1975년 창비시선 2번으로 간행되었다. 당시 창작과비평사는 시의 대중화를 위해 시선 시리즈를 기획 발간하였는데 창비시선 1번은 신경림 시인의 『농무』였고 그 뒤를 이어 『국토』가 간행된 것이다. 그야말로 시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를 연 것이다. 이 시집은 출간되자마자 판매금지가 되어 박정희정권이 전량 수거해버렸다. 조태일 시인이 후기에 썼듯이 “목숨 부지하며 살아가기가 참말로 부끄러워 괴로움에 온 마음과 온몸을 조인 채 허우적거리며 살아온 5년 남짓한 소용돌이”(191면)의 결실인 『국토』는 ‘나쁜’ 권력을 정면으로 겨냥한 시집이었다.
밤낮 없이 저러는 풍경은
일몰이 와도 걷히지 않고
일출이 와도 걷히지 않는가.
―조태일 「옹기점 풍경: 국토 8」 부분
염무웅은 『국토』 발문에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사람됨의 본바탕을 잊어버리고 빼앗기고 짓밟혀 왔”(187면)다고 진술하고 있다. 조태일 시인은 마지막 시집이 된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1999)까지 총 여섯권의 시집을 모두 창비시선에 상재하였다. 1999년 7월 마지막 시집을 간행한 직후 마포의 창작과비평사 근처 호프집에서 조태일 시인과 나는 몇분들과 함께 낮술을 마셨다. 일종의 시집 출간 축하주였는데 그것이 조태일 시인이 마신 마지막 술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음날 간암 판정을 받았고 두달 후인 9월 7일 우리 곁을 떠났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그의 친구들이 조태일 시인 기념관을 2003년 개관하였고 이후 조태일 시인 기념사업회가 사단법인으로 정식 출범하였다. 기념사업회(이사장 박석무)와 곡성군, 그리고 한국작가회의가 맡아 조태일 시인 사후 20주기인 올해 9월 7일 제1회 조태일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창비 2018)의 이대흠 시인이 영예의 초대 수상자가 된 것이다. 조태일 정신을 유연하고 폭넓게 보면서 시집의 예술적 성취에 주목하자는 것과 젊은 세대의 목소리에 주목하자는 것이 이번 심사위원들(신경림 염무웅 최두석)의 선정 기준이었는데,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이 조태일 시인이 바라던 한국시의 융융한 흐름을 이어가며 독자적 시세계를 구축하였다고 본 것이다.
조태일문학상은 이제 첫발을 내디뎠지만 앞으로 우리나라의 시인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영예로운 문학상이 될 터이다. 곡성은 비로소 고향의 위대한 시인 조태일을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고향의 정신과 언어로 불의에 맞선 시인에 대한 고향의 보답이기도 하다. 조태일문학상은 조태일 시인의 시 정신을 기리는 문학상이다. 두 동강난 조국과 분단이 만들어낸 민중들의 고통은 평화적 통일과 자주적 독립이 이루어질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신음하는 국토에서 생명이 환호하는 국토로! 문학의 상상력은 여기에 있다. 어느 세상이 온다 해도 그러할진대 이런 진화가 조태일문학상의 본질이며 그러한 노력 또한 살아 있는 시인들의 몫이기도 하다. 사랑은 댓가를 반드시 마련하고 있기에.
이도윤 / 시인
2019.9.18.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