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창비주간논평

예멘전쟁, 누구의 이익인가

김재명

김재명

9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 정유시설 두곳에 18대의 무인기(드론) 공격이 벌어졌다. 그후 세계 주요 언론들은 엄청난 양의 뉴스와 추측성 분석 기사를 쏟아내왔다. 국제유가가 어떻게 요동칠 것인가, 미국과 사우디가 주장하듯 이란이 과연 무인기 공습에 책임이 있는가, 이란에 책임을 물어 미국이 전쟁을 벌일 것인가 등에 관한 것들이다. 국내 언론도 상상력을 동원한 보도 흐름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쉬운 것은 ‘분쟁의 한복판에 놓인 예멘 사람들이 왜, 어떻게 전쟁의 고통을 받고 있으며’ ‘예멘 참극에 책임이 있는 가해 집단들은 누구이고, 그 와중에 이득을 챙기는 이들은 누구인가’ ‘국제사회가 어떻게 예멘의 비극을 끝장내도록 힘써야 하는가’와 같은 접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사우디 정유시설을 폭격한 18대의 무인기들은 평소에 깊이 관심을 두지 않던 예멘의 참극을 새삼 살펴보도록 일깨워주었다.

 

20세기 세계의 화약고가 발칸반도였다면, 21세기 세계의 화약고는 중동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시리아전쟁에 가려진 탓에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이 바로 예멘전쟁이다. 정부군과 반정부군 사이에 5년째 이어진 유혈 분쟁으로 9만명가량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분쟁지역의 희생자 집계는 정확할 수가 없다. 사람이 죽을 때마다 바로 옆에서 바를 정(正)자를 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경우 유엔은 2015년부터 사망자 집계를 포기했다. 시리아에서 50만명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지나지 않는다. 예멘전쟁 사망자 집계도 마찬가지다. 이를 집계한 민간기구는 ‘무장분쟁 지역 및 사건 데이터 프로젝트’(ACLED)라는 긴 이름을 지녔는데, 미 국무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는다니 왠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사우디 전폭기 공습, 많은 민간인 죽고 다쳐

 

그래도 분명한 팩트 하나. 예멘 사망자 가운데 상당수의 비무장 민간인들이 사우디가 띄운 전폭기의 공습으로 희생됐다는 사실이다(제주도로 온 예멘 난민들도 이 사실을 증언한 바 있다). 사우디 공습으로 죽은 민간인 희생자는 후티 반군(사우디가 지원하는 예멘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반군) 전사자 숫자의 3배에 이른다. 전쟁의 양상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전쟁 부상자는 사망자의 3~4배로 친다. 예멘전쟁 사망자가 9만명쯤이라면, 30만명 이상의 전쟁 부상자들이 자신의 망가진 몸을 추스르려고 ‘또다른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요행히도 살아남은 예멘 사람들은 생존의 벼랑에 내몰렸다. 유엔난민기구(UNHCR)가 최근에 발표한 자료(2019.9.13)에 따르면, 2870만 예멘 국민(2018년 추정) 가운데 긴급 구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2400만명, 집을 떠나 국내피란민이 된 사람이 365만, 예멘을 떠난 난민이 27만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일부가 한국 제주도에까지 들어온 것은 이미 국내 미디어들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얼마만큼의 대규모 난민이 생겨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고 있는가의 통계는 분쟁지역의 실상을 미루어 짐작하게 만든다.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끔찍한 인도적 재앙이 현지에서 벌어지는가는 외부 사람 또는 국제기구 요원이라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무엇보다 현장 접근이 어렵기 때문이다.

 

죽음의 상인들의 노다지판

 

예멘 분쟁은 2015년 후티 반군(시아파)와 정부군(수니파) 사이의 내전으로 출발했다. 그래서 흔히 ‘예멘 내전’이라 부르지만, 실제로 벌어진 전쟁 흐름을 들여다보면 ‘내전’이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이는 이란-사우디-러시아-미국이 개입해 혼전을 벌였던 시리아전쟁도 마찬가지다). 후티 반군의 뒤에는 시아파의 맹주인 이란이 있고, 정부군의 뒤에는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를 비롯한 걸프만 국가들이 있다(시리아전쟁에서는 거꾸로 이란은 정부군을, 사우디는 반군을 각각 지원해왔다).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쟁’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대리전쟁’이라 부르는 것도 꼭 맞지는 않는데,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UAE)는 전폭기를 동원해 직접 전투행위를 벌여왔다. 그렇다면 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중동지역의 또다른 국제전이고, ‘예멘전쟁’이라 부르는 것이 맞는다. 특히 사우디 전폭기는 민간인 주거주역을 무차별 폭격함으로써 숱한 희생자를 낳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떨어진 폭탄의 원산지는 대부분은 미국산, 그리고 일부는 영국산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영국도 예멘 참극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흔히 죽음을 팔아 돈을 벌기에 무기업자들을 ‘죽음의 상인’이라 한다. 지구상의 어떤 전쟁이든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리고 어디선가 진행 중인 평화협상이 있다면 어떻게든 깨지길 바라는 것이 무기산업체 경영진과 투자가들의 속내일 것이다. 예멘전쟁에 개입한 사우디는 미국 무기업체의 천국이자 노다지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2017년 5월 사우디를 방문하는 길에 10년간 1,100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거래하기로 합의했다. 트럼프의 사위이자 유대인인 재러드 쿠슈너(백악관 선임고문)는 록히드 마틴에 전화를 걸어 “값을 깎아주라”며 생색을 내기도 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 최근 자료에 따르면, 2014~18년간 사우디는 전세계 무기수입에서 1위를 차지했다(전체 무기수입액의 12.0%, 참고로 한국은 3.1%로 9위). 2016~17년 사이에 사우디에 무기를 수출한 나라는 당연히 미국이 압도적 1위(61%)이고, 2위는 영국(23%)이다. 3위 프랑스는 4%로 뒤처진다. 사우디는 그런 수입 살상무기들로 예멘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국제사회는 사우디와 미국에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지만 트럼프는 끄떡하지 않았다.

 

2018년 사우디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사건 뒤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이 사우디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분위기 아래 미 의회조차 무기수출 중단 결의안으로 트럼프에 제동을 걸었지만, 그는 거부권으로 맞섰다. 장사꾼 출신답게 지구촌 평화라는 대의보다 눈앞의 이익 추구가 먼저임을 거듭 드러냈다. 그런 참에 사우디 무인기 사건이 터졌으니 트럼프로선 그리 나쁜 상황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수렁에 빠졌다”는 소리를 듣는 미국이지만, 이란으로 전쟁판을 넓힌다면 무기업체 돈도 벌게 하고 1년여 남은 대선에서 표도 얻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순간 느끼지 않았을까.

 

이스라엘이 바라는 미국-이란전쟁

 

마지막으로 누가 사우디 정유시설을 향해 무인기를 날렸을까. 미국의 트럼프가 첫날부터 대뜸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이란일까. 현실주의 정치학자들은 한 국가의 결정이 ‘합리적’이라 여긴다.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는 국가이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선택을 한다는 얘기다. 이란이 사우디 정유시설을 공격함으로써 얻을 이익과 그에 따르는 불이익을 가늠해볼 때 답은 뻔하다. 더이상 잃을 게 없다는 막가파식 결정을 지금의 이란이 내릴 이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와는 달리, 사우디 전폭기의 잇단 공습으로 가족을 잃은 후티 반군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넘친다. 그들은 무인기 공격에 성공하자 기뻐하면서 처음부터 “우리가 공격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미국과 사우디는 이란이 범인이라 우긴다.

 

나는 사우디 정유시설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쳐들어갈 때부터 “바그다드 다음은 테헤란이야”라며 전쟁의 북소리를 울려대던 이스라엘 극우강경파들을 떠올렸다. 21세기 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친미정권이 들어선 뒤로, 이스라엘의 안보를 위협할 만한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중동 국가를 꼽으라면 다름 아닌 이란이다. 미국 내 유대인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과 손잡은 이스라엘은 미국이 이란을 손봐주길 간절히 바라왔다.

 

“1분 안에 보복공격을 명령할 수 있다.” 트럼프는 백악관 참모들과의 회의에서 사우디 정유소 공격의 책임이 이란에 있다면서 이렇게 목청을 높였다. 바로 그 무렵, “미스터 트럼프, 말만 하지 말고 그냥 전쟁 버튼을 눌러줘요”라고 바랐을 어둠의 세력(무기업체 등등)에 이스라엘은 함께하지 않았을까. 만에 하나 트럼프가 전쟁 버튼을 누르는 일이 벌어진다면, 중동은 더 큰 전쟁의 불길 속에 휘말려들 것이고, 중동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먹구름이 드리워질 것이다.

 

김재명 /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2019.9.25.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