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한반도 비핵평화, ‘희망고문’이 되지 않으려면
하노이 북미 간 노딜 이후 6·30 판문점회동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한반도는 어느 누구도 다음을 예측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천신만고 끝에 북미 실무협상이 시작될 예정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7개월, 판문점회동 이후 2~3주라던 실무회담이 3개월 만에 열리게 된 것이다. 북한은 어제(10월 1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담화를 통해 “10월 4일 예비접촉에 이어 10월5일 실무협상을 진행하기로 합의하였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아침 북한은 강원도 원산 북방 일대에서 동해 방향으로 미사일을 발사했다. 기대감은 잠시,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젠 북미 실무회담이 언제 열릴지, 북미 정상회담이 정말로 성사될지 여부를 예상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언젠가는 열리겠지만 열린다고 좋은 결과를 무작정 기대하기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존재한다. 북미 간 대화가 재개되고 남북관계가 속도를 낼 것 같았던 기대감이 이젠 피로감으로 바뀌면서 희망고문이 되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실무회담이 늦어진 이유는 언뜻 미국의 실무회담 개최 요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이에 호응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시간끌기이자 대미 압박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애초에 북미 대화를 7월에 재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미연합훈련이 예정되어 있었고 북한도 하계훈련 기간이자 무기 현대화를 위한 시험발사가 필요했다. 군사훈련 중에 대화를 한다는 것은 북미 모두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국은 가만히 있는데 북한이 서둘러 최선희 제1부장의 담화를 통해 북미 실무회담의 날짜를 발표하고, 곧바로 미상의 발사체를 쏘아 올린 것은 결국 시간을 끄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미국임을 방증한다.
김정은과 트럼프 모두에게 되돌릴 수 없는 북미관계를 올해 안에 만들어야 할 필요와 중요성이 존재한다.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문제가 대선이 치러질 내년 연말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하며, 나아가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최소한 현상유지라도 필요한 상황이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올 연말까지로 미국과의 협상 시한을 공식적으로 밝힌 상태이고, 내년이 ‘경제개발 5개년 전략’의 마지막 해라는 점에서 북한 주민들이 경제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안정적인 안보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양측 모두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역진 불가능한’ 북미관계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싱가포르 선언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시작점(입구)을 담은 포괄적 합의를 채결해야 한다. 연락사무소 개설(싱가포르 1조), 평화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의 개시(싱가포르 2조), 모든 핵프로그램 동결과 영변 시설 폐기(싱가포르 3조, 9월 공동성명 5조 2항)가 필요하다. 추가로 스냅백(snapback)을 적용해 가역적으로 한미 연합훈련의 지속적 중단과 비핵화 진행 상황에 따라 대북제재와 인도적 지원 문제 등을 열어둔다면 북미 간 합의가 가능할 것이다.
이 정도 수준에서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2021년 5~6월까지, 즉 내년 대선 이후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 진용이 꾸려지고 북한의 제8차 당대회가 열리는 약 1년 6개월 동안 이를 차분히 이행함으로써 역진 불가능한 북미관계의 초석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내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 합의가 성사돼야 한반도 비핵평화는 진정한 입구를 통과해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또 그래야만 2021년 하반기 이후 북미협상의 2라운드를 시작해 한반도 비핵평화의 한 단계 도약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북한은 미사일을 계속 쏘아대고, 미국은 한미 연합훈련과 대북제재를 지속한다면 과연 한반도 비핵평화가 가능할까. 이에 대한 솔직한 문답부터 곧 열릴 북한과 미국의 실무대화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마저 정체되어 있다. 판문점회동(6·30) 이후 남북관계가 호전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북한의 이른바 ‘한국 소외론’ 막말이 지속되고 있다. 북한은 하노이 이후 상황을 복기하면서 현 문재인정부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미국의 메시지만 전달하며 끌려가고 있다고 재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을 설득하는 중재자 역할을 남측에 기대하기란 비현실적이고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북미 간 중재 역할을 우리에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서 ‘통미봉남’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대남 비난은 오히려 남한이 중재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집착을 버리고 남북관계에 집중해줄 것을 바라는 간절함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을 1년 앞둔 올 연말까지 역진 불가능한 북미관계와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의 결합이 필요하다. 북미관계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냉정하고 신중하게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를 만들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 우선 북핵문제와 미중관계에 남북관계가 종속되지 않기 위해 한반도 문제의 책임 있는 당사자로서 입장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촉진자이자 중재자 역할로 나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
제재 국면에서 경제적 접근 전략은 분명 한계가 있고, 북한이 우리 생각만큼 크게 반기지도 않을 것이다. 제재와는 무관한 군사 분야의 합의서를 한층 구체화해서 한반도의 군비 통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남북한 지뢰제거와 경원선 연결, 북한 선박의 우리 작전수역 내 통과 문제나 해주 직항로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의제들은 모두 이미 남북 간에 합의되었거나, 논의 테이블에 한번 이상 오른 적이 있는 것들이다. 부정적인 미래를 상상하기보다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가 필요한 때다. 남북관계 진전으로 인해 생길지도 모를 한미 간의 불편함이나 남남갈등에 대한 우려 등을 이겨낼 용기 말이다. 우리가 금강산에 지금껏 다시 못 가는 이유 역시 상상력이 아니라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닌지 되새겨봐야 한다.
김동엽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2019.10.2.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