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세종대왕과 2019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
미국 MIT와 하버드 대학의 배너지(A. Banerjee), 두플로(E. Duflo), 크레이머(M. Kremer)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의 영예를 얻었다. 이들은 기존 수상자들과 여러모로 대조된다. 경제학계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개발도상국 출신과 여성이 포함됐고, 연령상 어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상대적으로 드문 배경을 가진 올해 노벨상 수상자들과 15세기에 활동한 세종대왕과 과연 공통점이 있을 수 있을까? 놀랍게도 공통점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현실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실험적인 접근법(experimental approach)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세종 초부터 관리들이 자기 입맛대로 농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실태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이에 농민의 경제력을 반영한 조세제도를 설계하여 관리들의 횡포를 막고자 하는 정책이 요구되었다. 농민의 경제력은 경작지의 비옥도와 강수량 등 해마다 변동하는 기상상황에 크게 좌우되었기에, 이 두가지 요소를 감안한 대안적 조세제도가 논의되었다. ‘공법’이라 불리는 이 조세 개편안은 세종 12년에 구체화되었고, 해당 안을 관리뿐만 아니라 정책에 직접 영향을 받는 농민에게 찬반조사 후 실시하여 현실성 여부를 가늠했다. 이후 보완을 거듭해, 세종 22년 경상도와 전라도, 다음해 충청도에서 각 2개 현을 뽑아 총 6개 현에서 시험적으로 적용했다. 이 결과 나타난 부작용을 추가적으로 보완하여 세종 26년에 공법제도가 확정 발표되었다.
이러한 세종의 정책결정 과정은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들의 공로로 인정된 실험적인 접근법과 맥을 같이한다. 이 접근법은 흔히 무작위대조실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RCT)이라 불리는데, 분석 대상인 정책(세종의 새로운 조세개편안)을 무작위로 추출한 일부 그룹(6현)에 적용하고, 이들과 조건이 동일하지만 정책의 적용을 받지 않은 그룹(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나머지 현)과 결과물(조세부담)이 충분히 상이한지 통계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이다.
무작위대조실험법은 의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60년대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도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미 사용된 바 있다. 올해 수상자들은 인도, 케냐, 인도네시아 등 개발도상국에서 사회·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그 효과를 평가하는 데 이 실험법이 활용되도록 기여했다. 더욱이 이들이 주축을 이루는 압둘 라티프 자밀 빈곤퇴치연구소(J-PAL)는 세계 각국의 정책담당자 및 연구진에게 행정적·기술적 지원을 제공하여 무작위대조실험법을 보급하고 있다. 이는 개발도상국의 빈곤 등을 연구하는 개발경제학 분야에서 무작위대조실험법이 주류가 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고, 그 공로가 올해 노벨상 심사위원회에서 인정된 것이다.
무작위대조실험법은 최소한의 가정(assumptions)만으로 특정 정책이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얼마나 미쳤는지 통계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막대한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고,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장기적인 효과를 분석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존재한다. 이러한 무작위대조실험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해보는 것은 어떨까? 장단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접근법은 지금 한국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그리고 양극단으로 치닿는 민심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문가들이 시간을 들여 고안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막상 현실에 적용해보면 의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미국에서 무작위대조실험에 기반해 대규모로 시행된 13개의 사회복지 정책들을 분석한 결과, 단지 2개만이 통계적으로나 비용 대비 의미있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실효적인 정책을 입안할 가능성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에는 쏟아지는 수많은 정책 가운데 과연 어떤 것이 효과가 있는지 데이터를 통해 평가하는 자정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 자세한 데이터 수집 없이 새로운 정책을 한번에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신빙성 있는 정책 평가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 결과 특정 정책의 목표달성 여부와 기존 정책 대비 개선 여부가 과학적인 근거를 토대로 분석되지 못하고, 각자 자기 주장만 고집하며 갈등을 빚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경제성장률 하락,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빠른 저출생·고령화, 청년실업과 일자리 불안을 감안할 때 지금 한국에서 민간의 추가적인 조세부담 여력은 많지 않다. 따라서 효과가 미진한 정책을 과감히 폐지해 인력과 세금을 적절하게 재배분할 필요가 있다. 신념에 의해서 정책을 결정할 것이 아니라, 국민적인 공감대가 이뤄진 정책목표를 선정하고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정책을 과학적으로 설계·보완하는 정책결정 프로세스가 절실하다.
이수형 /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
2019.10.2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