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길거리의 정의와 상도(常道): 애나 번스 『밀크맨』, 창비 2019
이곳은 길고 우울한 이야기 속에 파묻혀 있어서 진정 빛나는 사람이라 해도
이 어둠속으로 들어오면 어둠을 이겨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둠에 포섭될 위험이 있고 심지어는 자기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다.
-『밀크맨』 135면
『밀크맨』(Milkman, 홍한별 옮김)은 장소명과 이름 등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는 고유명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친절한 소설이다. 단지 주인공이 1970년대에 살고 있으며, ‘반대파 무장세력’이 지배하는 분쟁지역에 산다는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에게는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다. 화자는 ‘나’로 불리고, ‘나’를 포함한 주변 인물들은 ‘가운데 언니’ ‘남자친구’ ‘동생들’ 등 일상적 ‘관계’에서 유래한 호칭이나 별명을 통해 언급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사정은 철저하게 ‘나’의 시선으로 제한하여 세계를 재구성하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에서 나온다. 영국, 아일랜드, 북아일랜드의 정치적 관계에서 유래한 역사적 갈등은 이 소설의 관심사가 아니다. 열여덟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다만 ‘물 건너 나라’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반대파’와 ‘수호파’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며 으르렁거리는 ‘일상화된 폭력’의 공간일 뿐이다.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애나 번스(Anna Burns)의 자전적 체험을 담았다고 하지만 작중의 ‘나’는 딱히 어느 쪽도 옹호하지 않는다. 일상의 영역에서 본다면, 각 세력이 내세우는 정치적 대의는 주민들을 통제하는 수단이자 이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든 밀고자로 취급하여 생명까지 빼앗는 명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이 불친절하다고 해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도리어 작중인물이 처한 상황이 직관적으로 전달된다고 해야겠다. ‘물 건너 나라’나 ‘국경 너머 나라’와 대립하고, 그 정치적 찬반의 입장이 곧 공동체 내부의 분열로 이어지는 상황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하니 말이다. 이 소설은 오랜 기간 폭력에 노출되어 감시와 통제에 무감해진 어떤 공동체의 일상을 한 소녀의 시선을 통해 담아낸다. 특히 체제의 폭력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체화되어 유사 폭력이 일상적 형태로 재생산되는 국면을 다루고 있다. 이는 특정 집단의 이념적 정당성을 옹호하기보다, 정치적 대립 국면 자체를 원동력으로 삼아 권력을 유지하는 통치체제의 민낯을 들여다본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밀크맨』은 폭력적인 상황에 놓인 여성의 인권 문제에서 출발한다. 어느 날 무장단체의 지도자인 ‘밀크맨’의 스토킹이 시작되면서 평범했던 ‘나’의 삶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늘 생명의 위협을 안고 사는 분쟁지역의 특성상 스토킹 정도는 그리 심각한 문제로 취급되지 않는다. 더욱이 무장단체의 점령지인 만큼 밀크맨의 스토킹이 처벌 대상이 될 리 만무하다. 여성의 성을 그저 전투의 긴장을 풀어줄 놀잇감이나 권력자의 전리품쯤으로 도구화하는 세태에서 빚어진 일이다.
분쟁지역의 여성 문제를 예각화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거둔 성취 중 하나지만, 사실 이 소설은 그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룬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폐쇄적 공동체 내부에서 생겨나는 각종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주제로 삼는다고 하겠다. 정치적으로 경직된 공동체에서 생겨나는 각종 인권 문제들, 예컨대 여성·아동·성소수자 등에 대한 차별 문제가 망라되어 있다. 세상사에 무관심했던 주인공은 스토킹 사건의 당사자가 됨으로써 이웃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른바 “길거리의 정의”(50면)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작가의 펜 끝이 밀크맨이 아니라, 밀크맨과 ‘연애’를 한다며 ‘나’의 도덕성을 운운하는 사람들을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공동체 내의 약자를 향한 폭력은 다수의 편견을 우군으로 삼는다. 밀크맨의 스토킹을 ‘밀회’라 믿고, 그러한 억측을 사실이라 확신하는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주인공을 진짜 위기로 내몬다.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절망감은 주인공의 의식 구조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온다. 루머를 만들고 유포하는 자들을 향한 분노와 경멸은 차츰 비관적인 체념으로, 급기야 그 만남은 ‘밀회’였을지도 모른다는 무기력한 승인으로 변해간다.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군중의 편견 앞에서, 억측은 진실이 되어버린다.
주인공이 맞닥뜨린 ‘길거리의 정의’란 ‘공동체 문화’라든가 ‘지역 민심’ 같은 좀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밀크맨』에서 문제 삼는 ‘길거리의 정의’는 학습된 편견이 갖는 맹목성, 그리고 불온한 자로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무조건 공동체의 판단에 의탁하는 수동성 등으로 뒤덮인 부정적 개념이다. 달리 보면 이는 생명의 위협에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시간이 만들어낸 생존의 지혜이자 보호기제이기도 하겠다. 이에 공동체의 규범에 맞서거나 벗어나려는 시도는 오만한 저항으로 간주되고, 당사자는 공공의 적으로 분류된다. 작가는 이들을 “상도를 벗어난 사람들”(94면)이라 부르고 있다. 상도(常道)를 벗어난 사람으로 배척당하는 계기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매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성별과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꿈꾸기에 배척당한다. 주인공인 ‘나’는 미처 몰랐지만, 그는 이미 밀크맨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습관 때문에 공공의 적으로 분류되었다.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한다는 이유에서다. 요컨대 ‘길거리의 정의’란 공동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차별과 배제의 기제이자, 체제의 폭력을 일상의 수준에서 재생산하는 희생양 제조 시스템의 다른 이름이다.
소설 『밀크맨』의 핵심은 생존과 안정을 위해서는 기존 체제에 순응하라고 요구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 공동체의 규준을 받아들인 이들의 삶에 드리운 비관주의를 그려낸 데 있다. 언제나 차별과 배제의 가능성을 의식해야 하는 삶이 행복할 리가 없다. 무리에서 배제된 이들은 고독하고, 무리에 배제되지 않은 이들은 저마다 포기한 자유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 때문에 이 소설의 결말부는 길거리의 정의에 짓눌리기보다 자기의 선택에 의해 행동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스토리의 일관성이 약해지는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작가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그려내고자 애쓴다. 어떤 체제하에서든 자기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 어둠에 매몰되어 ‘존재의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기란 문제점을 들추기보다 백배 천배나 힘든 일이다. 때문에 기어이 희망을 꺼내놓고야 안심하는 작가의 모습이 애잔하면서도 정말 고맙다.
정주아 / 강원대 국문과 교수
2019.12.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