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 촛불혁명이라는 화두
‘촛불혁명’은 진짜 혁명인가? 그렇다는 의견을 나 스스로 내놓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질문을 화두로 삼아 연마하는 일이지 싶다. 불가의 화두 공부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기존의 온갖 상념을 비워가는 과정이듯이, 촛불혁명에 대해서도 정답을 찾기보다 간절히 물음을 지속하는 것이 요체다. ‘촛불혁명이라는 것이 진행 중이라면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그런 시기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렇게 끊임없이 물으며 살자는 것이다.
교과서 지식을 앞세워 ‘촛불’이 혁명 개념에 안 맞는다고 가르치려 드는 것은 일종의 ‘꼰대질’이다. 반면에 2016-17년의 촛불항쟁을 곧바로 촛불혁명 자체로 단정하고 그런 주장을 계속하는 것도 또 하나의 꼰대질이기 십상이다.
지난 가을의 서초동 촛불집회도 화두를 연마하는 마음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개혁이 위기에 처했을 때 100만이 넘는 시민들이 ‘느닷없이’ 쏟아져나와 문재인정부에 출구를 열어주고 검찰개혁을 국민의 명령으로 굳혀준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서초동집회 자체도 초기와 후기의 양상이 다르거니와, 오랜만에 다시 타오른 촛불이 혁명이 진행 중임을 확인해주었을지언정 탄핵을 이끌어낸 2016-17년의 항쟁에 비견할 성질은 아니었다. 그때만 못했다고 비하할 까닭도 없고 그때의 재연인 듯 과대평가할 일도 아니다. 촛불혁명이 실제로 진행 중이라면 그럴수록 촛불을 들지 않고 수행해야 할 과업이 산적한데, 동시에 촛불시위가 꼭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다시 나설 수 있는 형국임을 일깨워준 것이다.
혁명은 겁나는 것
무엇보다 경계할 점은 별 생각 없이 ‘혁명’을 들먹이며 자기도취에 빠지는 일이다. 혁명은 본디 처절하고 겁나는 것이다. 프랑스혁명, 러시아혁명 모두 국내의 유혈사태뿐 아니라 외국군이 개입한 전쟁과 살육을 겪어야 했다. ‘촛불혁명’의 경우 그 철저히 평화적인 성격 때문에 유혈진압이나 군사적 개입의 명분이 약했던 데다 한반도가 워낙 일촉즉발의 화약고인지라 누구도 그런 모험을 감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쨌든 혁명인 이상 그 청산대상들이 순순히 물러서길 기대해선 안된다. 저쪽은 기득권을 안 놓치려고 죽기살기로 나오는 마당에 ‘화합’하고 ‘협치’하라고 타이르는 것 또한 한가한 이야기다.
더구나 혁명의 목표가 한반도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면 반혁명세력의 반격에는 막강한 외국세력이 동참하게 마련이다. ‘촛불’은 세계적으로 극우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흐름 속에 예외적으로 성공한 민주화운동이기도 했다. 그런 민주화가 한반도 남북에 걸쳐 새로운 체제를 건설할 길을 열었다는 점이 혁명적인 면모인데, 이는 기존의 동북아질서와 미국의 세계지배에도 심각한 위협이 됨을 뜻한다. 일본 아베정권의 촛불정부 흔들기나 북미화해에 대한 미국 주류층의 끈질긴 반대가 모두 공연한 몽니가 아닌 것이다.
그럴수록 결정적인 남한 내부의 전선
혁명이 겁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혁명기의 신속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단순히 제자리걸음이 아니라 전보다 더 나빠지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거대 수구정당이 한때 국민을 속여서라도 집권하려던 ‘성의’마저 포기하고 나라망신 집안망신을 마다않는 집단으로 변한 모습이 바로 그렇다. 사법개혁의 시간이 다가오자 무소불위 권력의 민낯을 드러낸 검찰도 마찬가지다. 기득권과는 거리가 먼 일부 노년층의 반응은 따로 살펴볼 문제지만, 멀쩡해 보이던 신사, 숙녀, 지식인들 상당수가 극우집회에서나 나옴직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실제로 그런 집회에 합류하기도 하는 사태 또한 혁명기의 역사에서 낯익은 현상이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현 정부는 어떤가? 그동안 문재인정부의 행태가 촛불정부답지 않은 면을 자주 드러낸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적지 않은 시민들이 이제는 그런 호칭을 거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촛불정부 없는 촛불혁명을 어떻게 이어갈지에 대한 마련이 없이 결별선언만 하자는 거라면 이 또한 ‘촛불’이라는 화두를 쉽게 내려놓는 일이다. 합헌적 절차로 집권한 정부이기에 혁명정부로서의 한계가 엄연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서, ‘그래도 촛불혁명에 유용한 정부인가’라는 기준으로 시민 각자가 나라의 주인답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문재인 대통령 자신은 촛불혁명에 복무하겠다는 초심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는다. 다만 그가 거느린 정부에서 ‘촛불’을 화두로 삼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의문이다. 작년 지방선거 압승 이후 대통령은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는데 여당 인사나 청와대 참모 중 실제로 등골이 서늘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권력층의 도덕적 풀어짐으로 여러 사고가 터지는 시점에서 지금이라도 오싹해지는 사람이 좀 늘어났으면 한다. 특히 여당은 최근 선거법개정 과정에서 누구 못지않은 기득권수호 집단임을 보여주었다. 자기 의석을 하나라도 늘리려고 군소정당을 압박해서 결과적으로 한국당 의석이 조금이라도 덜 줄게 만들어준 것이다.
2020년, ‘촛불’의 새 국면을 여는 해로
그러나 어쨌든 ‘4+1’ 연대를 구성하여 반촛불세력의 의회 점거를 깨뜨린 것은 평가할 만하다. 이제야말로 여당은 주체적인 대북관계·대외관계와 지혜로운 국내개혁의 선순환구조를 만들며 다른 개혁세력들과 함께 늦게나마 제21대 국회를 ‘촛불국회’로 진행할 큰 그림을 제시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되찾아야 한다. 연말의 일부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가 그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사실 남북관계 발전에 대한 미국의 방해가 극심해진 2019년에 문재인정부가 한층 주체적인 대응에 나서지 못한 데는 ‘남한 내의 전선’이 너무 불안했던 현실도 크게 작용했다. 정부가 미국에 조금이라도 맞서려 하면 곧바로 ‘한미동맹 파탄’을 울부짖는 세력이 너무도 강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거제도개혁과 검찰개혁 입법만으로도 촛불정부다운 주체적 행동을 보여줄 여지가 늘어날 것이다.
물론 70년, 아니 100년이 훨씬 넘게 우리 사회에 켜켜이 쌓여온 폐해가 단기간에 정리될 리 없다. 그러나 정쟁 뉴스와 검찰발 수사 보도에 가려진 우리 시대의 현장을 둘러보면 촛불 이전과는 완연히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곳곳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공부모임, 놀이모임, 사업모임이 진행되고 있으며 K팝과 한국영화, 한국문학, 한국어 열기 등 각종 한류의 기세도 촛불시대의 활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차별, 노동천대, 안전무시 등에 대한 저항도 끈질기게 벌어지고 있다. 이에 대한 정부나 기업의 대응이 너무나 구태의연해서 시민들의 분노를 낳고 있지만, 이 분노를 냉소가 아닌 개혁 노력으로 이어가려는 민주시민의 대오도 건재하다. 밑으로부터의 이런 기운이 국가정책으로 연결되는 것을 막는 차단벽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지만, 그중 가장 큰 벽 일부에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새해에는 시민의 기상이 더욱 드높아지고 더 큰 성취를 이루리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이를 위해 ‘촛불혁명’이라는 화두에 대한 연마가 지속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 이 글은 한겨레 2019년 12월 30일자에 동시 게재됩니다―편집자.
백낙청 /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2019.12.30.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