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고려인 문학’은 가능한가: 한민족 이산문학 교류행사를 다녀와서
‘고려인 문학’ ‘고려인 문단’이라는 말은 실제로 성립될 수 있는가? 글을 시작하기 전에 이 문제를 먼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분석해보기도 전에 답은 이미 단호하다. 말하자면 불가능인 것이다.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영역은 너무도 광대하다. 고려인들은 이 넓은 지역에 풀씨처럼 흩어져 살고 있다.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 비교적 고려인이 밀집해 살고 있는 곳이고, 그밖의 지역에서 고려인 문학인들은 너무도 외롭고 적막하게 살아가고 있다. 창작하는 습관을 이어가고 있지만 발표할 데도 없고, 창작집을 발간할 기회나 여건도 전혀 갖추어져 있지 않다. 특히 한국어로 작품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고 절대다수는 러시아어로 작품을 쓰고 있다. 구소련 시절이나 구소련 붕괴 이후에나 사정은 여전히 불변이다.
1923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신문 『선봉(先鋒)』의 지면을 통해 재능 있는 시인, 소설가, 극작가의 작품이 처음으로 지면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조명희, 계봉우, 한병철, 조기천, 연성용, 태장춘, 강태수 등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1928년 8월 ‘고려인기자협회’에서는 당대의 러시아 문호 막심 고리끼에게 조언을 요청했고, 고리끼는 이에 응답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서 고리끼는 ‘조선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성과를 달성했는지, 생활 속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지에 대해서 많이 써달라’고 주문했다. 『선봉』에 게재된 고리끼의 편지는 고려인 창작의 도약과 발전을 위한 크나큰 자극이 되었다. 특히 조선에서 망명해 온 작가 조명희의 활발한 창작활동은 실질적 모범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1937년 늦가을에 실시된 고려인 강제이주로 말미암아 해체와 붕괴의 파탄에 빠지게 되었다. 소련공민증이 없었으므로 거주이전의 자유나 선거권이 없었고, 군복무를 할 수도 없었다. 창작을 할 때도 감시와 검열이 심해서, 떠나온 조선이나 연해주 지역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은 곧바로 반국가 행위로 낙인찍혀 혹독한 보복과 징벌을 받았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된 조명희의 제자 강태수 시인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그는 연해주에서의 평화롭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밭갈이하는 처녀에게」라는 작품을 발표했다가 인민의 원수로 몰리고 체포되어 무려 16년 동안이나 강제노동의 혹독한 시절을 견뎌야 했다. 유명한 북한의 서사시 「백두산」을 쓴 조기천은 당시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사범대학의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대학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모스크바의 대학으로 연수를 보냈지만 조기천은 도착하기도 전 열차에서 소련경찰의 검문 끝에 송환 당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민족차별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 고려인으로서 창작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하나같이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자기 작품이 혹시라도 검열에 걸리지는 않을까 싶어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작품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자기가 작품을 써놓고도 늘 조심하고 객관성에 위배되는 부분이 없는지를 살피고 또 살폈다. 특히 ‘고향’ 혹은 ‘조국’이라는 단어를 쓸 때 조심했다. 이 두 단어 앞에는 반드시 ‘소비에트’가 들어가야만 했다. 만약 이 접두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 표현 자체가 남한 또는 북한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받기 마련이었다. ‘강제이주’라는 말도 극도의 금기어였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 언론에서 이 말은 지금도 금기시된다.
긴 암흑기를 거친 결과, 과거 고려인 문학과 지금 한국문학 사이에는 사소한 연결성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1992년 한국문인협회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해외문학대회’를 개최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문학인들이 한국·미국·일본 등의 작가와 교류한 최초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고려인 문학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발전하지도 정착하지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에게 신문이나 잡지 등 발표지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제이주 이후 민족언어인 한글과 한국어를 교육받지 못해 창작의 언어적 바탕을 상실한 것도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상황은 정치적 환경이나 문화적 토대가 바뀐 지금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엄청나게 넓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서 고려인 문학의 명맥을 실낱같이 유지하는 이들이 모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고려인 문학’을 함께 생각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바로 한·러 수교 30주년을 맞아 지난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경계 넘나들기: 고려인 문학의 탈향, 이주, 정주의 삼각형」(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학번역원, 주러한국문화원, 모스크바 외국문학도서관 공동개최)이다. 이번 포럼은 고려인 문학과 한국문학의 진심 어린 화해와 소통을 위해 기획되었다. 고려인으로서 세계적 명성을 확보한 빛나는 작가 아나톨리 김을 비롯해서 다양한 시인, 소설가, 문학평론가가 한자리에 모였다. 필자도 한국의 발표자로 참여했는데, 많은 이들이 최근 펴낸 『강제이주열차』(창비 2019)의 발간경위와 배경해설에 공감해주었다.
그러나 ‘강제이주’라는 말이 결코 온전하게 성립될 수 없음을 이번 행사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30년 이상을 소련의 언론사 기자로 활동한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소설가)은 “고려인 이주 과정에서 강제성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정당한 비용을 지불받았고” “이주가 소련정부의 극진한 배려 속에서 이뤄졌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그 모습에서 강제이주의 비극적 이중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팔순을 넘긴 아나톨리 김의 열정적 발표에서는 큰 감동을 받았는데, 특히 그가 ‘경계인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를 말하고, 그 글쓰기 과정에 ‘습관적인 조심성과 체질화된 두려움’이 스며 있음을 이야기할 때 고려인의 슬픔과 고통이 단적으로 느껴졌다. 고려인이라는 존재가 안타깝고 아픈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옛날에도 지금도 소외와 단절 속에 방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갈 길이 멀고 아득하다는 갑갑함도 있었지만 한국문학과 고려문학이 끈끈하게 이어져야 할 필연적 운명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연히 깨달았다. 돈독한 뜻을 가진 한·러 문학인들이 추운 겨울 모스크바에 모여 민족문학을 위한 작은 잉걸불을 지폈으니 그 불길 사그라지지 않고 반드시 되살아나 장차 큰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확신을 갖고 귀국길에 올랐다.
이동순 / 시인, 문학평론가
2020.1.29.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