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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국회를 만들 차례다

강경석

강경석

식물국회니 동물국회니 말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20대 국회는 전에 없는 개혁·입법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소추안을 가결함으로써 촛불혁명에 호응했고 준연동형비례대표제 도입과 선거연령 하향을 핵심으로 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을 통해 민의의 다양성을 정치적으로 수렴할 제도적 기반을 확장했다. 검경수사권조정법(형사소송법, 검찰청법) 개정안과 함께 공수처 설치 법안을 통과시켜 권력기관 개혁과 민주적 통제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 당장의 실감은 부족할지언정 그 하나하나가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여 주권자들의 여망을 대변한 결실이었다.

 

그럼에도 20대 국회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박하다. 그것은 그들의 대의행위 과정이 질서정연하기는커녕 스스로 걸림돌로 작용한 면조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상 최초의 대통령 탄핵 인용으로 민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음에도 호시탐탐 역진을 기도해온 수구야당은 말할 것도 없지만 촛불혁명이 가져다준 절호의 기회를 온전히 살리지 못한 집권세력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 촛불시민들이 가슴 졸인 대목은 한두군데가 아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검찰지휘권 행사에서 나타난 정부의 무능이다. 정권 초기 검찰에 적폐청산을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난해 총장 주도의 검찰인사를 수수방관한 데서 보듯 대표적 개혁 대상의 하나였던 검찰의 생리를 간과함으로써 정부는 민주적 통제력의 개입 여지를 스스로 축소시켜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수구야당의 정치적 공간을 제약하는 목전의 정파적 실리에 도취된 나머지 검찰을 더욱 노골적인 정치행위자로 만들어버린 자충수이기도 했다. 촛불혁명의 지속이 저변의 상수로 버텨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어떤 결과가 펼쳐지고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소위 4 + 1을 중심으로 주요 개혁입법을 처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촛불혁명에 대한 정당들의 인식에는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 총선을 앞두고 반촛불세력에 유리한 프레임으로나 활용될 여당심판론과 야당심판론의 낡은 정치공학적 대립이 재연되는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문제는 집권당의 승리나 그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촛불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하느냐이다.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문제마저 정쟁의 도구로 삼는 수구야당의 ‘막가파’식 정치로 집권당은 오히려 ‘야당복’을 누리게 된 셈이지만 그에 기댄 심판론에 안주해서는 그나마 있던 ‘야당복’마저 깎아먹게 되고 선거의 승패를 떠나 촛불의 동력을 한결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 집권당이 일방적 대승을 거두어 독주한다면 반작용의 심화로 개혁에 차질을 빚고 차기 대선 전망 또한 흐려질 여지가 생기는 반면, 수구야당이 예상 밖의 선전을 한다면 역진 시도들로 인한 혼란의 가중으로 정치가 실종될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개정된 선거법 아래서는 어느 한 정당이 과반수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데다 설령 집권당이 일방적 대승을 거둔다 한들 이미 역사적 시효를 소진한 87년 헌정체제를 개혁하는 데까지는 힘이 못 미치게 되어 있다. 4 + 1의 경험은 소중한 자산이다. 촛불을 부정하는 수구세력의 정치적 공간을 가능한 한 제약하면서 촛불정신 아래 다양한 가치와 노선들이 동거하는 연합정치의 최대한을 모색하는 것이 관건이다. 개헌을 통해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산하고 극단적 이념대결과 불평등을 해소하여 분단체제 극복의 기초체력을 강화하려면 때로는 보수조차 무조건 열외 대상은 아닌 것이다. 20대 국회가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고 정치가 거리와 광장으로 이탈하게 된 것도 촛불혁명기에 걸맞은 거버넌스 체계의 구축에 실패한 데서 말미암는다. 촛불혁명으로 행정부가 교체되었고 사법개혁이 시대적 과제로 부상했다. 이제는 촛불국회를 만들어 미진한 개혁과제들의 해결을 뒷받침하고 개헌으로 촛불혁명에 제도적 결실을 부여할 때이다.

 

촛불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합헌혁명이었다.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던 많은 혁명들이 비상상태의 상시화 가운데 환멸과 반동의 시간대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지만 촛불은 그 지혜의 반영일 합헌혁명적 성격으로 인해 반혁명을 적정선 아래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촛불 이전에 선출된 입법부를 그대로 안고 가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무한정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촛불혁명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21대 총선이 그저 4년마다 돌아오는 수많은 총선 중 하나에 머물 수 없는 이유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0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0.2.19.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