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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대학과 인권

홍성수

홍성수

한 대학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교수의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대자보 수십장이 붙어 있었고 학생들은 집회 중이었다. 아직 이런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아 학생들이 밖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그런데 사정을 듣고 보니 인권제도와 기구가 제법 잘 구축된 대학이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공식절차를 밟지 않고 집회를 통해 싸우는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거긴 어차피 믿을 수가 없어서요”였다. 지난 10년간 대학·기업 등 개별 조직에서 인권정책을 세우고, 인권제도와 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하며 실제로 참여해온 사람으로서 충격적인 답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날 대학의 인권 문제는 이 대답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권의 관점에서 대학은 특별한 곳인가? 그렇지는 않다. 인권운동이나 인권정책이 발전해온 경로를 보면, 먼저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결국 국가의 인권보장 의무를 확인시키는 데 성공했고 유엔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인권체제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20세기 말에는 다시 국가를 통한 인권보장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국가인권기구(한국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의 설립 붐이 일어났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 군대, 기업, 초·중·고·대학 등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인권 실천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은 인권보장 의무를 지닌 여러 단위 중 하나일 뿐이다. 인권을 특별히 강조해야 하는 조직은 대개 위계구조가 강력하여 약자에 대한 보호가 필요한 곳이다. 군대, 기업, 학교, 경찰, 교도소 등에서 인권 문제가 빈번하게 제기되어온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대학 역시 교수와 학생이라는 위계구조하에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가지 인권 문제가 있기에 대학에서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필요했다.

 

미국에서도 성차별과 인종차별 문제가 선도적으로 제기되어온 곳 중 하나가 대학이었다.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인권 문제를 제기한 곳도 대학이었고, 1990년대 성희롱사건이 최초로 제기된 곳도 바로 대학이었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학생 인권보장을 위해 싸웠고, 구체적인 성과로는 성희롱·성평등센터나 인권센터 설치로 이어지기도 했다. 요컨대, 대학은 한편으로 인권 문제에 취약하기에 인권이 이야기되어야 할 공간이었지만, 다른 한편 인권 문제를 선도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잠재 역량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 대학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원화’되고 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학생들이 입학하고 있다. 유학생이 급증했고, 이주 배경을 가진 학생들도 늘어났다. 장애 관련 입시전형과 장애학생지원센터 등이 만들어졌고, 장애학생과 함께 수업을 듣는 것도 더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학부뿐만 아니라 대학원에 진학하는 유학생들도 늘었고, 해외에서 온 교수진의 구성도 다양화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적 배경과 종교적 배경도 넓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소수자들이 늘어났다.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는 원래부터 대학에 존재했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더이상 침묵하지 않고 차별에 맞선 권리투쟁을 조직한다. 십수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학사회가 이러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많다. 대학에서 인권 문제를 풀어갈 때 기본은 행동강령(code of conduct), 차별금지선언, 인권헌장, 인권·차별금지정책 등을 통해 인권이 대학의 주요 이념임을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나 담당 부서, 상담·진정·조사 기구 등 제도와 기구를 하나하나 마련해나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체제를 제대로 갖춘 대학은 거의 없다. 이러한 전체적인 전망과 구조에 기초하지 않은 채 대학 인권정책이 추진되다보니 형식적으로 기구만 설치하는데 그치거나 제대로 시스템이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종 보도되는 각종 성희롱·성폭력 사건, 인권침해 사건 등 대부분은 대학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다. 그러다보니 적시 대응에 실패하거나 그나마 있는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오히려 더 큰 불신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번 트랜스젠더 여대 입학을 둘러싼 사건도 마찬가지다. 사실 트랜스젠더가 성별이 분리된 공간인 여군, 여대, 여성쉼터 등에 접근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는 아주 전형적인 인권 문제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온 이슈다. 하지만 대학은 이 예측 가능했던 문제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 적시에 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

 

특정 대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국가의 책임도 크다. 국가가 대학을 무한경쟁에 빠지게 하는 사이에 대학에서의 인권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현재 재정 형편으로는 인권정책을 추진할 여력이 없다는 개별 대학의 호소가 잇따랐고, 400개가 넘는 대학이 각각 인권정책을 수립하고 인권제도를 확립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있었지만, 국가는 묵묵부답이었다. 인권 문제는 더이상 대학 자율에만 맡길 일은 아니다. 더 넓게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차별금지법 하나 제정하지 못했다. 차별이나 인권이라는 말이 무슨 금기어라도 된 듯 정부 정책에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만 앞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다시, “거긴 어차피 믿을 수가 없다”는 한 학생의 답에서 출발해야 한다. 왜 여전히 차가운 바닥에 앉아 농성을 해야만 문제가 해결되고, 왜 학내에서 겪을 괴롭힘이 두려워 입학을 포기해야 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지…… 1990년대 말 성평등센터 설치를 시작으로 대학 인권정책이 시작된 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정말 바뀌어야 하고,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때가 되었다.

 

홍성수 /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2020.2.20.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