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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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구멍 뚫린 사회와 면역이라는 커먼즈

백영경

백영경

코로나19 감염증의 신규 확진자 수가 며칠째 100명대를 유지하면서 코로나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낙관론이 고개를 들기 무섭게 지난 10일 서울 구로구 콜센터의 집단발병 사례가 알려져 불안과 공포가 다시 퍼져가고 있다. 콜센터 관련 확진자가 이미 100여명에 가깝지만 이후 더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고, 11일 0시 기준 전국 신규 확진자 수도 다시 200명을 넘어버렸다. 더욱이 대중교통망이 발달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수도권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종전의 ‘신천지 사태’와는 또다른 충격을 주고 있다. 수도권의 요양병원이나 병원 등 집단시설에서 전파가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이미 있어왔으나 막상 서울 역세권 빌딩 안에서의 집단발병이 현실로 닥치자,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생각보다 장기화될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커지는 것이다.

 

중국, 일본, 미국, 이딸리아 등의 코로나19 대처 방식은 각국의 사정과 특징을 잘 드러낸다. 전염병의 확산과 대응을 둘러싼 한국의 상황 역시 한국사회의 특수성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양상이다. 해외 언론도 지적하듯이 한국은 투명한 정보공개로 메르스 때의 권위주의 정권과는 확연히 다른 정부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빠르고 효과적인 진단검사를 통해 의료기술의 선진성을 보여주었다. 진단키트가 없어서 검사도 못하거나 검사를 받아도 수백만원 상당을 자비로 지출해야 하는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정부에 쏟아지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방역과 의료체계는 비난할 수준이 결코 아니다. 물론 학교도 닫아걸고 직장에서는 재택근무를 권하는 마당에 마스크를 사기 위해 다닥다닥 붙어서 길게 줄을 늘어선 모습을 보면 마스크 수급 관리에서 조금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전염병의 유행은 그 자체로 초유의 사태인 만큼 어느 정도 혼란은 불가피하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스크가 부족하다고 아우성인 한편으로 나보다 더 필요한 남을 위해 양보하고 배려하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가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반면 집단감염이 퍼져가는 경로 역시 한국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보다 먼저 코로나19 사태를 겪은 중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보다 이번 바이러스에 더 취약하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에도 치명률은 남성에게 더 높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확진자 수에서는 여성, 그 가운데서도 20대가 유독 많은 것이 한국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집단발병이 확인된 종교시설, 체육시설, 요양시설, 근로여성임대아파트는 모두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지는 공간이다. 요양시설 돌봄노동이나 콜센터의 노동조건이 열악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그밖에도 일의 특성상 대면 접촉이나 집단근무를 피하기 어려운 노동 영역 가운데는 여성노동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주거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으니 집단발병 사례 역시 여성에게 집중된다. 신천지에 몰입한 20대 여성이 많다는 사실 역시 청년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많은 여성들이 처해 있는 열악한 삶의 조건은 결국 방역의 구멍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감염자의 동선이 거주민은 물론 지역을 통과하는 사람에게까지 경보음과 함께 휴대폰 재난문자로 전달되는 상황 역시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IT강국인 대한민국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을 일이다. 감염자의 성별과 연령까지 특정한 분 단위의 동선이 공개되면서, 감염자들은 본인은 물론 가족의 신상까지 알려지고 행적에 대한 비판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코로나19에 걸리는 것보다 확진 후 동선 공개가 더 무섭다는 사람들이 많았고, 급기야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확진자의 자세한 동선 공개가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자세한 행적 공개는 누구에게든 뜻하지 않은 곤경을 안겨줄 수 있지만 소수자들에게는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 텔레비전 뉴스는 노숙인 지역에서 확진자가 나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며 조심스레 손을 씻는 어느 노숙인의 모습을 보여줬다. 좋은 의도로 소개한 사례겠지만, 노숙인이 아니라 누구라도 코로나19에 걸릴 수 있는 게 현실임을 감안한다면, 발병했을 때 가해질 비난과 낙인을 두려워하는 노숙인의 모습은 한국의 소수자가 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동선 공개를 두려워하는 소수자들은 감염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진료를 기피하기도 하니, 이 역시 차별과 혐오가 방역의 허점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방역 당국의 권고를 따르지 못하는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이번 콜센터의 집단발병 사례를 놓고서도 왜 마스크도 쓰지 않고 좁은 공간에서 근무를 했느냐, 재택근무는 왜 하지 않았느냐, 모여서 밥은 왜 먹었느냐 하는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콜센터 업무의 특성상 마스크를 쓰고 일하기 어렵고, 재택근무도 가능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구에서 왔다는 사실을 숨기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확진을 받은 이의 경우, 이미 대구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입원을 거부당한 경험이 있었고, 검사를 요청했으나 증상이 없어 거절당했다고 한다. 날더러 어쩌라는 말이냐는 항변이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다. 신천지 교인인 요양보호사들이 계속 근무를 한다는 비난의 소리도 높지만, 밀교적 특성 외에도 생계의 문제가 크다는 소식도 들린다. 현실을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방역이 말처럼 쉽지 않음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듯 방역의 허점은 단순히 의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 이미 존재하던 문제들이 불거져 나와 현실을 제약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우리는 개개인이 단지 독립된 단자가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언제나 인간뿐 아닌 수많은 존재들로 구성된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단순히 환경 속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에게 환경이며, 그 ‘우리’는 단지 인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사회가 전염병에 대한 면역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도 연결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각과 더 나은 방식으로 연결되기 위한 노력은 필수적이다. 『면역에 관하여』(열린책들 2016)의 저자인 율라 비스에 따르면, “면역은 우리가 공유하는 공간”이며, “함께 가꾸는 정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커먼즈(commons)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면역을 하나의 커먼즈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그것이 국가와 시장에만 맡겨둘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시민과 지역이 함께 주체가 되지 않는 한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 사태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공공의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 방역에서 국가나 공공기관의 역할이 막중하다는 사실 자체야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방역과 의료를 국가가 제공해야 할 기본 서비스로만 여긴다면 시간에 쫓기고 물리적 제약이 큰 상황에서 나의 안전만을 앞세우는 무책임한 요구나 국가에 대한 끝없는 비난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또한 국가 차원으로만 감당할 수 없는 문제도 많다. 감염 확산의 우려가 있는 장애인시설이나 요양시설을 중심으로 코호트 격리가 이루어지면서, 돌볼 사람 없이 남겨진 이들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경우 국가가 지원해야 할 몫이 있는 것도 분명하지만, 국가가 전염병 사태를 가정해 인력과 자원을 상시 유지할 수도 없는 만큼 모든 것을 국가에 맡길 수 없다는 현실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대비가 비교적 잘되어 있는 상황이더라도 담당공무원이나 의료진의 감염 같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지는 경우 언제나 허점은 생기게 마련이다. 가령 노숙인이나 독거노인에게 제공되던 식사 및 급식이 감염 우려 때문에 끊기는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를 국가가 일일이 메워주리라 기대하기 어렵고 시장에 맡기기란 더욱 상상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 돌봄을 가족에게 맡기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갑자기 문을 닫은 학교와 어린이집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는 맞벌이 가정의 사정을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전염병 사태에서 가족은 가장 먼저 감염이 확산되는 취약한 공간이기도 하다.

 

결국 시민들이 스스로 주체가 되고 지역이 단위가 되어서 주체적으로 구멍을 메우고 필요한 일을 찾아서 하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것이 한 사회의 면역체계인 것이다. 사실 개인들이 각자도생을 추구하면서 의료를 시장에서 구매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서비스 상품으로만 생각하는 사회라면 국가의 힘만으로 전염병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더욱 잦아질 수도 있는 전염병을 막아내는 것은 면역으로서의 커먼즈를 함께 만들고 가꿀 때에만, 다시 말해 인간 이상의 존재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돌볼 자세가 되어 있을 때에라야 가능해진다.

 

백영경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20.3.1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