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총선 승리 이상의 것
사람들이 집밖을 나서지 않게 되자 야생동물들이 시가지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에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새로 나타난 현상 중 하나다. 하지만 이는 본래 야생동물이 서식하던 장소를 오히려 인간들이 무단 점거해온 것인지 모른다는 새삼스런 깨달음도 가능하게 한다. 코로나19를 비롯한 온갖 바이러스의 주기적 유행이 장기간 지속된 생태계 침범과 개발 때문이라는 지적들을 염두에 두면 이런 현상은 확실히 모종의 상징처럼 읽히는 면이 있다.
지금까지의 일상이 ‘정상’ 작동을 멈추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그러나 야생동물만은 아닐 것이다. 인공위성이나 항공모함도 거뜬히 만들 수 있지만 마스크나 방호복은 필요한 만큼 제때 생산하지 못하는 ‘선진국’과 실업과 가난이 바이러스보다 더 두려운 자국민들 앞에서 적실한 방역·이동통제 수단을 찾지 못하는 ‘후진국’들 사이의 분업질서가 실은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었던가를 나날이 목격하는 중이다. 국부(國富)의 위계에 따른 노동과 상품생산의 지구적 분업구조는 국내적으로는 대기업의 하청, 재하청 연쇄로 복제되어 나타나거니와 감염병에 취약한 저임금 비정규 집합노동의 현장들이 요즘처럼 주목받았던 때도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는 온갖 사회적·생태적 결함과 위기들의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코로나19가 진정된다고 해서 콜센터 노동자들의 근무환경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하루 빨리 이 ‘역병’을 극복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자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사태를 조장한 것이 바로 그 ‘제자리’들이 아닌지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는 코로나19 사태 이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지만 돌아가서도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더이상 전처럼은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이 공통의 감각과 비상한 기분은 다른 나라에서라면 모르되 일찍이 촛불혁명을 경험한 우리에게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방역 선진국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정부 차원의 투명한 정보공개와 의료계의 헌신에 더해 비상한 국면일수록 더 높은 수준으로 발현되는 시민의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정부와 시민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촛불이며 그 불길이 여전히 살아 있기에 난관 속에서도 이만한 대응이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21대 총선이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코로나19 사태가 워낙 엄중해 총선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그런 와중에도 여야 정객들과 정치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직업정치인 중심 사고에 함몰된 계산들이 난무하다보니 미래통합당과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과 같은 정치적 병리현상들이 나타나도 브레이크가 제대로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시각을 유권자 중심으로, 그중에서도 촛불시민의 입장으로 이동시켜 상황을 진단해볼 필요성은 전에 없이 커졌다. 이번 총선은 4년마다 으레 돌아오는 총선 중 하나가 아니라 의회 내 적폐세력을 심판함으로써 지난 3년여 동안의 ‘고난의 행군’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촛불 이후 첫 총선이기 때문이다. 지금 촛불은 자신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스스로 평가해야 할 시험대에 올라 있는 셈이다.
그러나 촛불시민들 앞에 주어진 시험답안지는 불행히도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이다. 마음에 차는 항목이 없더라도 각자가 생각하는 모범답안에 최대한 가까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 오히려 고도의 집단지성이 요청되는 때이다. 모범답안의 기준은 무엇보다 어떤 선택이 촛불의 완성에 더 가까운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비상한 시기에는 비상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말마따나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는 이론이나 상상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던 아이디어와 비전들이 일정한 실감과 함께 실현 가능성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난지원금 논쟁으로 촉발된 기본소득 문제나 그린뉴딜 공약 등으로 일부 가시화된 생태적 대안들도 더이상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총선 이후 촛불의 상상력을 극대화해 사회적 에너지로 새롭게 집약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따라서 코로나19 사태에 잘 대응한 현 정부의 건재와 집권여당의 승리만으론 충분치 않다. 문재인정부가 촛불정부를 자임하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촛불혁명의 완성을 선거구호의 일부로 내세웠지만 그들은 결코 촛불의 전부가 아니며 그 일부가 되기에도 모자랄 때가 많았다. 현실적으로 여당의 승리 없는 촛불의 승리가 어려운 만큼 그들의 선전을 한편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정의당을 비롯해 개혁작업에 적극 동참했던 군소정당들에도 나름대로 약진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촛불을 참칭한 기득권세력의 구태가 반복되어도 의회 내에서 제어할 수단이 막막할뿐더러 촛불시민의 승리에 준하는 선거결과라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보수야당이 내건 정권심판론이 제대로 안 먹히는 이유는 단지 현 정부와 집권여당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촛불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했다면 여당도 애써 만든 준연동형비례제를 누더기로 만든 과오를 반성하면서 진보개혁진영의 소수정당들에 연대의 손길을 내밀어야 했다. 애석하게도 그 기회는 이미 상당부분 놓쳐버렸지만 유권자들의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최후의 그리고 가장 강력한 수단이 남아 있다. 그러한 수단이 정당하게 그리고 마땅히 행사될 때 촛불은 새로운 전진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더이상 전처럼 사는 것이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게 된 마당이라면 더욱.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0.4.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