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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19, ‘멋진 신세계 2.0’?

서재정

서재정

“앞으로 세계는 BC와 AC로 나뉠 것이다.” 굳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을 인용할 필요도 없겠다. 세상은 ‘코로나19 이전’(Before Corona), ‘코로나19 이후’(After Corona)로 나뉠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사람들에게 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삶의 방식이 일변하고, 경제가 뒤흔들리고, 국가가 달라졌다. 사람이 사람과 관계하는 방식도, 나라와 나라가 관계하는 방식도 뒤집어졌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무엇일까? 코로나19가 지나간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문제는 정치야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가 지적한 것과 같이 코로나19로 촉발된 위기의 요체는 ‘정치적 문제’다. 그는 코로나19 극복에 두가지의 중요한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봤다. 첫째, 국가 차원에서 중앙집권적 통제와 감시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에게 힘을 주며 사회적 연대를 통해 극복할 것인가? 둘째, 국제 차원에서 국수주의 고립으로 이 위기를 막을 것인가 아니면 국제적 연대를 통해 맞설 것인가? 그가 제시한 틀 안에서 본다면 세상은 이미 중앙집권 강화와 국수주의적 고립 증대의 길에 성큼 들어섰다.

 

BC에는 전쟁이 국가의 힘을 강화했다면 AC에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 국가의 중앙통제를 강화한다. 과거 시대에는 국가안보가 국민의 안보와 동일시되었고, 국가가 안전해야 시민이 안전하다는 논리가 정당화되었다. 1, 2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냉전이 그 논리의 피와 살이 되었다. 시장의 자유가 초래하는 불안정을 고용안정과 사회복지로 보정해야 한다는 경험도 국가를 정당화했다. 하지만 그 논리는 소련의 붕괴로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신자유주의의 득세로 힘을 잃었다. 비틀거리는 국가를 이제는 코로나19가 구했다. 시민안보를 담보로 국가가 화려하게 전면에 재등장했다. 그 강도와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모든 나라에서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은 ‘국가’다. 도시를 봉쇄하기도 하고 국민의 움직임을 감시하기도 한다. 치료도, 방역도, 예방도 국가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백신 개발도 국가 간의 경쟁이 되고 있다.

 

국가 사이의 관계에서도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 바이러스의 유입을 막기 위해 사람과 물자를 국경에서 차단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중국 바이러스’라는 주장이 바이러스의 최초 출현지가 미국이라는 주장과 맞부딪치는 사이 ‘외국’에 대한 불신과 불안 바이러스는 스멀스멀 전세계를 감염시키고 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출신이나 인종, 종교, 젠더에 따른 배제와 차별의 바이러스가 퍼지고 있다. 이 와중에 세계보건기구는 갈 길을 잃고, 바이러스 퇴치를 위한 국제협력을 촉구하는 사람조차 찾기 힘들다. 바야흐로 ‘성곽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그리하여 하라리의 지적은 정확하다. 코로나19는 보건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위기다. 개인의 권리와 국제사회의 협력이 퇴조하고 국가주의가 그 중심에 서고 있다.

 

그런데 무슨 정치?

 

그러나 하라리의 분석틀은 정확하되 부족하다. 그 부족함의 단초는 키신저를 통해서도 찾을 수 있다. 그는 하라리가 우려한 국수주의 고립을 말한다. “글로벌 무역과 자유로운 이동을 기반으로 번영하는 시대에서, 시대착오적인 ‘성곽 시대’ 사고가 되살아날 수 있다.” 그가 묻지 않는 것은 그 ‘번영하는 시대’가 누구를 위한 번영이었느냐는 정치적 질문이다. 그 질문을 들이대면 키신저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사실 번영을 누리던 미국의 퇴락임이 금방 드러난다. 국가주의가 대세가 된다고 해서 모든 국가가 동등하게 대세가 되는 것이 아니다. ‘번영의 시대’에도 정점에 있는 국가가 있었고 바닥에 있는 국가가 있었다. ‘성곽의 시대’에도 국가 간 위계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라리의 표면적인 정치 분석보다 깊게 들어가야 한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지만 코로나19로 받는 충격이 모든 나라에 균등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국가의 힘이 크게 약화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타격을 덜 받고 회복하는 나라도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經濟新聞)의 분석에 따르면 1분기 기업 순이익이 전세계적으로 감소했지만 그 감소폭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었다. 중국은 26%, 미국은 36%, 유럽은 71%, 일본은 78% 감소했다. 2분기에도 순이익 감소가 예상되지만 경제활동을 가장 먼저 재개한 중국의 감소폭이 가장 작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제금융기구(IMF)도 유사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코로나19로 모든 나라의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는 가운데 미국은 –5.9%를 기록할 것이지만 중국은 예외적으로 1.2%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더욱이 내년에는 중국이 9.2% 성장하는 데 비해 미국은 4.7% 성장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정체가 더욱 확대되는 모습이다.

 

더욱이 정부의 조치가 이러한 차이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실업수당 기간과 대상자를 대폭 확대하여 실업자를 폭발적으로 양산시키고 있다. 한달 만에 2600만명이 실업수당을 신청하는 등 케빈 해싯 백악관 경제선임보좌관조차 “대공황 시절에 가까운 실업률”을 우려하고 있다. 반면 시 진핑 정부는 중국공산당 100주년인 2021년까지 GDP를 2010년 수준에서 두배로 증대시킨다는 목표를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신 기간산업’에 투자하여 5G네트워크 및 전기차 충전망, 고속 철도망 등을 완비하고 에너지 효율화와 첨단기술화로 경제 체질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물론 시 진핑이 꾸는 ‘중국의 꿈’이 실현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계 정치학자 민신 페이는 시 진핑의 퇴장 이후 중국이 ‘급진적 변혁’을 겪을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하강이라는 추세는 당분간 인위적으로 뒤집기 어려울뿐더러 코로나19가 이를 오히려 재촉하고 있다.

 

물론 미국은 여전한 금융권력이다. 세계경제는 기축통화인 달러를 기반으로 움직이고 달러의 유일한 공급원은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다. 벤 버냉키 전 연준이사회 의장은 이번 코로나19 위기를 통해서 미국 연준이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앙은행이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준은 한국은행을 포함, 전세계 14개 중앙은행과 스와프협정을 맺었고 타 국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미국 국채 레포(Repo)시장도 개설했다. 코로나19로 위축된 경제를 유동성 확대로 돌파하려는 모든 국가들이 미국 연준에 손을 내밀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 달러가 세계 경제의 기축통화로 기능하는 것은 원유시장 덕분이다.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국가들이 원유를 달러로만 팔기로 한 까닭에 원유를 수입하는 모든 국가는 달러를 필요로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역을 통해 달러를 벌어들여야 했다. 달러를 매개로 이뤄지는 무역시장과 금융시장의 규모가 이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해도 달러를 기축통화로 받쳐주고 있는 힘의 원천은 여전히 원유시장이다. 그리고 그 원유시장의 요동을 코로나19가 격발했다. 달러의 지위는 이제 지켜봐야 할 변수가 되고 있다.

 

미국 공화당 상원 전국위원회는 코로나19에 대한 책임을 중국으로 돌리라는 보고서를 냈고, 중국 현대국제관계연구원은 반중정서의 비등 및 미중 무력충돌이라는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서를 냈다. 해서 맑스의 말은 다시 빛난다. 역사는 두번 반복한다. 한번은 냉전이라는 비극으로, 한번은 유사 냉전이라는 소극(笑劇)으로.

 

그러면 시장 정치는?

 

하지만 국가 단위의 경제규모 분석은 철 지나 효용가치가 떨어진 고물이다. 이미 시장은 국가의 틀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경제가 직격탄을 맞았다고 하지만 모든 부문이 공평하게 피해를 입은 것은 아니다. 자동차, 항공 등 전통 제조업이 눈에 띄는 어려움을 겪고 있고 여행, 유통업 등 전통 3차산업도 피해를 입었다. 4차산업혁명의 총아로 불렸던 공유경제에도 찬바람이 불고 있다. 반면 IT와 바이오 기업 등이 혜택을 입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사상 최고 수준의 분기 순이익을 올렸고, 존슨앤드존슨의 순이익도 55% 늘었다. 재택근무와 화상회의, 온라인 수업이 늘면서 줌 비디오 커뮤니케이션 같은 업체들이 급부상했다. 아마존 같은 온라인 유통업체들은 직원을 더 뽑았다.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 엔터테인먼트, 네덜란드 테이크어웨이닷컴 같은 음식배달 서비스 기업, 원격의료도 주요 수혜자다.

 

이렇듯 시장권력이 재편되고 있다. 전통적 2차산업뿐만 아니라 3차산업, 심지어 4차산업의 일부도 타격을 입고 약화되고 있다. 반면 언택트(비대면) 산업이 대두하고 있다. 교육과 의료, 상담, 외식 등 모든 분야의 소비가 급격하게 언택트화하고 있다. 사티야 나델라 MS 최고경영자가 지적하듯이 “2년치에 해당하는 디지털 전환이 두달 만에 일어났다.” 코로나19 위기가 지나고 나면 이 전환도 되돌려질까? 이제는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에서도 개별화, 유연화, 신속화, 저스트인타임(just-in-time)을 충족하는 기업들이 승승장구할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양식도 이에 맞춰 전환될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가 주장한 것처럼 ▲원격근무가 가능한 노동자 ▲필수적 노동자(의사, 간호사, 배달자, 운전기사 등 필수적이지만 위험부담에 노출된 노동자)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 ▲잊힌 노동자로 나뉠 수 있다. 원격근무 노동자가 임금이나 위험부담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므로 그 그룹에 들어가려는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물론 원격근무 노동자는 모두가 플랫폼 노동자가 될 위험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승자는 코로나19에서 승리하는 산업이 되지 않을까. 중앙집권적 권력을 강화한 국가는 이미 경제회복을 명분으로 새로운 시장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가 신 기간산업에 투자한다면 이러한 신산업은 물 만난 고기가 될 것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처럼 실업수당을 확대하면 기존 기업들이 불필요한 노동력을 퇴출시키고 신산업으로 나갈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전국민 고용보험은 전국민 플랫폼 노동자화에 매우 잘 조응한다. 사실 ‘포스트 코로나19 사회’는 이미 잉태되어 있는 것이다.

 

사회가 배제된 멋진 신세계

 

이러한 AC의 현실에 비춰본다면 칼 폴라니의 주장은 중대하게 수정되어야 할지 모른다. ‘이중운동’은 자기조정적 시장과 사회의 자기보호 사이의 경쟁과 충돌이 아니다. 국가와 시장이 ‘이중주’로 사회를 재편하는 과정이다. 주선율을 연주하는 주자는 국가와 시장이 번갈아 맡을 수 있고 이에 따라 주선율이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둘은 사회에서 권력과 이윤을 뽑아내는 한 화음을 유지한다. 이들의 화음 속에서 사회의 배제는 확대된다. 어찌 보면 코로나19로 치명적 타격을 입은 것은 시민사회인지도 모른다.

 

코로나19는 ‘탈탄소 사회’,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 생태가 공생하는 ‘생태사회’의 미래도 보여줬다. 산업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활동 자체가 줄면서 공기가 맑아졌고 동물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고 포집을 늘려 지구 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자는 빠리협약이 갑자기 현실이 될 가능성도 보여줬다. 그러나 가능성은 스스로 현실화하지 않는다. ‘그레타 툰베리’가 도처에서 떠들고 행동하지 않는 한, 원격근로 노동자들이 사회적 거리를 뛰어넘어 공생을 모색하지 않는 한 AC는 국가와 시장이 지배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해서 만국의 네티즌들이여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라. 당신들의 건강은 국가가 관리할 것이며, 당신들의 연결은 시장이 책임질 것이다. 잃을 것은 사회적 관계의 부담일 뿐이며 얻을 것은 고립된 개인의 해방이다. 국가와 시장, 만세!

 

2034년까지의 미래를 미리 그린 영국 드라마 「이어즈앤이어즈」의 뮤리얼 할머니 목소리만이 남아 울린다. “세계가 이렇게 될 동안 우리는 무얼 했나? 이건 정확히 우리 모두가 만든 세상이야. 축하한다, 모두들!”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교수 

2020.5.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