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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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모든 제재는 반인류적이다

김성경

김성경

코로나바이러스로 드러난 인류의 민낯은 처참할 정도다.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대부분의 규칙, 규범, 가치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긴 인간의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정언명령은 현실에서는 차등적으로 적용되거나 그나마도 쉽사리 무력화되곤 했다. 패권국인 미국의 상황만 봐도 그렇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사망자 중 흑인의 비율은 십만명당 41명으로, 백인 16명에 비해 두배 이상 높다. 그만큼 인종에 따라 생활환경과 의료서비스 접근에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증명한다.

 

미국의 상황이 이럴진대 ‘제재’를 받고 있는 국가의 상황은 어떨까?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에 따르면 5월 12일 현재 이란은 109,286명의 확진자와 6,685명의 사망자를 기록하며 세계에서 열번째로 많은 확진자 수를 나타내고 있다. 소위 ‘선진국’도 의료장비와 의약품 부족을 호소하는데 국제 경제제재 대상국인 이란의 상황이 어떨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의 전직 외교관 및 국제기구 수장들이 위급한 이란 상황을 감안하여 경제제재 일부를 완화할 것을 권고한 데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인명 구조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제재’를 완화할 리 없다.

 

국제사회의 제재는 유엔헌장에 따라 국제법을 위반한 국가에 대한 대응조치로 시작되었다. 2003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이란의 핵 개발 의혹을 제기한 이래로 2006년 국제사회는 유엔안보리결의문 1696를 필두로 여섯차례의 결의문을 통해 이란에 대한 전방위적인 경제제재를 시행했다. 초기에는 핵 및 미사일 개발을 제한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후에는 군사 영역뿐만 아니라 이란 경제 전반에 고강도의 제재가 이루어지게 된다. 거기에 미국의 독자 제재 일환으로 이란과 교역하는 국가나 기업까지 대상 영역이 확대되어갔다. 촘촘한 제재 망 속에서 이란 주민의 삶은 피폐해졌으며, 이제 코로나사태를 겪게 되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사회경제적 기반마저 송두리째 파괴되었다.

 

북한도 예외일 수 없다. 북한정부는 공식적으로 코로나19의 발병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여러 정황적 증거는 감염병의 확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란에 버금갈 정도의 고강도 경제제재를 받아온 북한에 감염병은 더욱 가혹할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의약품 부족은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식량 부족으로 인한 북한 주민의 건강 상태가 더 나빠지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와 미국의 독자제재 틈바구니에서 북한체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북한이 그토록 선제적으로 국경을 봉쇄한 이유는 감염병 앞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단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제재 상황에서 의약품 부족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현실 인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제재가 무엇이기에 인간이라는 가치보다도 우선된단 말인가? 국제사회가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인류 생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유효한가? 여기서의 ‘국제사회’는 과연 ‘국제’(國際, inter-national)였던 적이 있었는가? 만약 ‘국제’가 존재했다면 패권국이 자행해온 수많은 침략과 전쟁은 왜 똑같은 잣대로 ‘단죄’되지 못했는가? 국제 평화와 인류 번영을 지킨다는 명목의 ‘제재’가 누군가의 생명을 앗아간다면, 그것은 과연 ‘누구의’ 평화이며 번영일까?

 

누군가는 북한이건 이란이건 애초에 국제법을 지키면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제재를 문제 삼기 전에 그 빌미를 준 체제와 권력을 먼저 처벌해야 한다고 말이다. 굳이 여기서 이들 국가의 핵 개발 동기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 근본으로 돌아가보자는 뜻이다.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이해관계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그 인류적 가치를 오롯이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다. 단순히 인도적 지원을 늘려야 한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정도의 외침이라면 지금까지도 충분히 해왔다. 단 한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위기상황은 한편으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 기회이기에, 현실적인 접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평화’라는 명목 아래 진행된 ‘국제사회’의 폭력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고,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그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얼마나 도구적으로 소모되어왔는지 폭로할 기회다. 코로나사태 이후에 인류는 전혀 다른 국제사회를 만들어내야 하며, 그것의 근본 원칙은, 모든 인류의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이제 우리는 “제재의 틀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교역을 시작하겠다” 혹은 “국제제재가 허용하는 인도적 지원을 늘려가겠다”는 식의 접근을 거부해야 한다. 적어도 사고의 수준에서만이라도 현실의 한계와 쉽사리 타협해서는 곤란하다. 오랫동안 우리의 사유를 가로막아, 마치 ‘상식’처럼 여겨져온 국제제재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황정은이 읽어낸 것처럼 상식의 상투성이야말로 강자의 논리, 그 힘의 언어가 무사유를 경유하여 재생산되는 것이다. “툴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디디의 우산』 189~90면)을 따른다. 당연한 것의 당연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 시작을 어떻게 할까? 영화 「가버나움」(2018, 나딘 라바키 연출)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무책임한 부모를 법정에 고발한 레바논 소년 이야기 말이다. 영화 속 법정이 어디인지, 법리적으로 범죄가 성립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을 일깨워줬다는 측면에서 영화는 그 자체로 전복적이었다. 그렇다면 제재로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이란의 여성과 어린이, 북한의 인민, 베네수엘라의 시민이 함께 ‘평화’의 이름으로 ‘제재’를 통과시킨 이들을 법정에 세우는 것을 상상해보면 어떨까? 강대국 몇몇의 정치적 판단과 결정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생명을 파괴했는지 낱낱이 밝혀내고, 인류의 이름으로 처벌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이들을 고발할 법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법리적으로 성립되는 죄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몸부림을 통해 국제사회의 이중성과 제재의 폭력성을 ‘사유’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을 시작하길 소망한다. 코로나 이후에 우리가 회복하고자 하는 일상은 ‘지금까지의’ 세계, 국제사회, 그리고 국가와는 다른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성경 / 북한대학원대 교수, 사회학

2020.5.1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