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디지털-그린-지역’ 뉴딜을 제안한다
‘한국판 뉴딜’이 논의되고 있다. 정부가 ‘뉴딜’ 개념을 들고 나온 것은 괜찮은 선택이다. 작금의 위기는 전염병이라는 외부 충격에 시스템 내부의 각종 모순이 결합된 구조적 위기이기도 하다. 위기 속에서 전염병 재난으로 인한 고통은 물론, 경제사회적·정치군사적 차원의 복잡한 현실 문제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방역 성과에 대한 논의도 시간이 지나면 여러 측면으로 등장할 것이다. 종합적 대응을 위해서는 복잡하고 이질적인 문제들을 연결하여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뉴딜은 정책·제도는 물론 권력·리더십, 담론·이념의 차원을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이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어떤 뉴딜을 추구하는가, 그리고 ‘한국판’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화하는가이다. 뉴딜은 회복을 지향한다. 회복에는 ‘복구적 회복’(bounce back)과 ‘전향적 회복’(bounce forward) 두가지가 있다. 뉴딜은 충격으로 파괴된 기존 질서를 복구하는 것, 기존 질서를 개혁하여 새로운 회복력을 형성하는 것을 모두 추구한다.
복구적 회복책의 대표적 사례는 미국이 내놓은 2.2조 달러 규모의 ‘CARES 법안’이다(2020년 3월 27일 통과). 여기에는 근로자 및 가계에 대한 지원과 기업의 고용유지 지원이 핵심을 이룬다. 주요 프로그램은 임금유지 3,490억 달러, 실업급여 확대 2,680억 달러, 가계 현금지원 2,930억 달러, 고용세 감면 및 사회보장세 납부 연기 2,520억 달러, 기업에의 유동성 지원 5천억 달러, 지방정부에의 보조금 지급 1,500억 달러, 연방기관의 추가적 재량지출 3,300억 달러 등이다.
중국도 성장률 전망을 제시하지 못할 정도로 불투명한 상황을 인정하면서 구호를 위한 회복 대책의 골격을 내놓았다(2020년 5월 22일 정부업무보고). GDP 대비 재정적자율을 2019년 2.8%(2.76조 위안)에서 2020년에는 ‘3.6% 이상’으로 증대했다. 1조 위안 규모의 경기 부양용 특별국채 발행안도 제시했다. 이렇게 추가 조성된 2조 위안 규모의 재정은 지방정부의 고용안정, 민생보장, 감세, 소비확대 등 조치에 사용할 계획이다.
위기상황에서 세계적으로 가속화되고 있는 것은 산업의 디지털화이다. 우리 정부도 이러한 디지털화 추세를 디지털뉴딜의 정책패키지로 내세웠다. 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 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SOC)의 디지털화라는 3대 프로젝트가 제시됐다. 이에 대해 새로울 것 없는 얘기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디지털뉴딜은 세계적 차원의 회복경로에 적응하려는 대책이다. 주요국가들이 추진하고 있는 회복 경로를 외면하고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가 별로 없다.
디지털뉴딜은 4차 산업혁명으로 지칭되는 제조업 혁신 운동의 연장선에 있다. 흔히 독일의 스마트팩토리 전략이 4차 산업혁명 추진책의 원형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세계적인 차원에서 4차 산업혁명이 주목받게 된 것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의 제조업 혁신 경쟁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 제조업 벨트의 쇠퇴 양상, 보호된 국내시장을 기반으로 한 중국 ICT 기업들의 약진이 부각되었다. 미중 갈등의 핵심고리가 된 화웨이는 5G장비 제조를 선도하고 있는 중국의 전략기업으로, 2012년에 통신네트워크부문 세계 1위에 올라섰다.
코로나19 사태는 디지털뉴딜 경쟁을 가속화할 것이다. 긴급구호 조치 이후 미국의 산업정책은 중국 견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5월 15일 미국 기술로 제작되는 반도체를 화웨이에 판매하려면 별도 승인을 받도록 규제를 강화했다. 거의 동시에 파운드리 업체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공장을 건설할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하는 ‘경제번영네트워크’에 대한 언급을 수면 위로 떠올리고 있다. 미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묶어 디지털 산업, 에너지, 인프라, 연구, 교육, 상거래 등에 대한 새로운 표준 동맹을 결성하려는 것이다.
중국은 2008년 이후 정립한 ‘중국모델’을 계속 가져가고 있다. 중국은 코로나19의 확산을 우한과 후베이성에서 차단하는 데 성공했으며, 코로나19로 인한 체제 위기감은 애국주의 상승 기류로 전환되고 있다. 전세계적 침체로 중국이 대외적 확장책을 공세적으로 밀고 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신(新) 인프라’를 성장동력으로 육성한다는 기조는 유지 중이다. 신 인프라 7대 분야는 5G, 인공지능, 빅데이터 센터, 산업인터넷, 특고압 송전·발전설비, 도시간 고속철도 및 궤도 교통, 전기자동차 충전설비 등이다. 이들 사업을 위해 2020년 지방정부 특수목적채권 발행액으로 3.75조 위안이 책정되었다(전년 대비 1.6조 위안 증액).
기존 경로와는 다른 새로운 길을 내는 전향적 회복책으로는 그린뉴딜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는 기후위기에 대한 합의점이 형성되어가는 중이다. 산업화 이전에 대비하여 기온이 1.5℃ 증가하는 지점을 파멸적 위기 국면으로 본다. 현재의 온난화 추세라면 2050년에 1.5℃ 증가선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기후위기를 막으려는 그린뉴딜이 추진되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미국과 중국이다. G20 국가 중 환경오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가 인도와 중국이다(2017년 추정으로 각각 232.7만명과 186.6만명). 그 뒤를 인도네시아(23.3만명)와 미국(19.7만명)이 따른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중국과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여러 통계에 비추어보면 상위 10개국 이산화탄소 배출량 중에서 중국이 약 40%, 미국이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인도, 러시아, 일본, 독일, 이란이 상위권이며, 한국 역시 7~8위 정도다.
그린뉴딜에 우호적인 곳은 유럽이다. 2019년 12월 EU는 ‘유럽 그린딜’이라는 장기전략을 내놓은 바 있다. 이에 따라 기후변화, 클린에너지, 순환 경제·산업, 에너지·자원 효율, 화학안전 생태계·종다양성, 친환경적 식량, 스마트 모빌리티, 즉각적 전환과 전환을 위한 재정 등을 전략적 의제로 설정했다. 반면 미국과 중국은 기후위기 대응에 가장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대선이 기조 변화의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기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 이후 심화된 미중 갈등과 전략적 경쟁은 그린뉴딜의 국제협력체제를 형성하는 데 최대의 장애 요인이다.
한국으로서는 글로벌 환경을 감안하면서 디지털뉴딜과 그린뉴딜이 중첩되는 부문을 중심으로 전향적 회복 전략을 구성해야 한다. 이때 자칫 미중 갈등의 골짜기에 몰려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위험 요인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플랫폼 경제는 미국 중심 세계와 중국으로 양분되어 있고 지금 중국 위주의 플랫폼 체계에 들어갈 수는 없는 상황이다. 글로벌화 속에서 형성된 가치사슬과 시장적 분업체계를 해체하는 데 가담할 수도 없다. 미중 양측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지 않도록 미리 위치를 선정하는 것, 갈등에 휘말리지 않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점에서 디지털뉴딜과 그린뉴딜뿐 아니라 지역뉴딜의 차원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전략적 관계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2018년 미국의 국내총생산은 20.5조 달러이고, 중국은 13.6조 달러이다. 한국 1.72조 달러, 일본 4.97조 달러와는 상당한 격차가 있다. 그러나 무역액 기준으로 보면 상황이 달라진다. 2017년 무역액은 중국 4.12조 달러, 미국 3.95조 달러, 일본 1.37조 달러, 한국 1.05 달러이다.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하면, 그리고 여기에 동남아와 북한을 연결하면, 미중 갈등에 대비하는 완충지대가 될 규모 정도는 된다.
한일관계 개선에는 일본이 주도하여 결성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활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국과 중국이 빠진 TPP는 그간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일관계가 개선되고 한국이 TPP에 합류하면 새로운 동력을 형성할 수 있으며 TPP를 통해 동아시아형 그린뉴딜의 틀을 만드는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군비경쟁과 연관된 원자력 문제를 피해 갈 수 없다. TPP 틀을 이용하면 원자력 안전을 위한 연구개발 진흥 방안과 그린뉴딜 협조체제를 논의하는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차원과 국내 차원을 묶는 지역뉴딜 구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한일관계와 남북관계 개선의 틀 위에서 북한의 원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에코 스마트시티 투자 사업을 설계하는 것도 시도해볼 만하다. 장차 북핵 문제와 국제제재 해결을 동시에 푸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한·중, 한·동남아 간에는 ‘디지털-그린’ 뉴딜을 도시공간에서 구현하는 국제협력 프로젝트를 논의해볼 수 있다. 국내적으로는 수출제조업의 구조조정 충격을 완충하기 위해 지역경제를 재구축해야 한다. ‘디지털-그린-지역’ 뉴딜을 순환형 지역경제 형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20.5.2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