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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이드 항의시위, 시민권운동을 넘어

한기욱

한기욱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죽은 지 19일째인 지난 12일, 27살의 흑인 남성 브룩스(R. Brooks)가 백인 경찰이 쏜 총을 맞고 죽었다. 웬디즈 드라이브-스루 통로에 차를 대고 잠을 자다가 식당 측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의 체포를 거부하고 도주하다 총격을 받은 것이다. 브룩스가 차에서 깨어나 경찰의 음주측정을 받는 장면부터 등에 총을 맞고 쓰러지기까지의 과정이 플로이드 동영상처럼 생생하게 찍혔고 천하에 공개되었다. 애틀랜타의 시장 케이샤 바텀즈(Keisha Lance Bottoms)는 그 동영상을 보고 가슴이 아프다고 하면서 그가 죽는 장면이 나올 줄 알면서도 동영상을 보는 동안 ‘그를 그냥 놔줘, 그냥 놔줘’를 되뇌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경찰이 차에서 자는 사람을 음주운전 혐의로 수갑을 채워 체포하려는 것도 납득이 안 되지만 도망가는 사람을 총질까지 해서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가게 내버려둬도 차량을 확보했으니 언제든지 소환해서 체포할 수 있는데 말이다. 20일 전 경찰이 위조지폐 혐의자인 플로이드를 수갑으로 채운 후에도 반항한다고 8분 46초 동안 무릎으로 짓눌러 죽였을 때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다. 브룩스 살해사건의 놀라운 점은 플로이드 사건으로 미국은 물론 전세계 시민들이 ‘체제적 인종차별주의’를 성토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살인이 또 벌어졌다는 점이다. 이게 체제 차원의 체질화된 관행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따지고 보면 2010년대 이래 이처럼 흑인의 생명을 앗아간 사건이 잇따랐다. 2012년 흑인소년 마틴(T. Martin)이 백인 자경단 지머만(G. Zimmerman)의 총에 숨졌고(이 사건으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운동단체가 결성된다), 2014년 에릭 가너(Eric Garner)는 ‘개비 담배’를 불법으로 팔았다는 혐의로 백인경찰에게 목졸림을 당해 죽었고(그 역시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브라운(M. Brown)은 손을 들었는데도 백인경찰에게 여섯발의 총을 맞고 죽었다. 2020년 2월 흑인청년 아마드 아버리(Ahmaud Arbery)는 ‘백인지역’에서 조깅을 하다가 경찰관 출신의 백인과 그 아들의 총에 죽었고, 3월에는 긴급의료요원이었던 테일러(B. Taylor)가 가택수색 영장을 받고 출동한 경찰들에게 자택에서 총살당했다.

 

현재 미국의 전역을 들끓게 하는 플로이드 항의시위는 1960년대 시민권운동 이래 역대급의 규모와 범위를 자랑한다. 맥이 통하는 이 두 운동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 양자의 차이는 60년대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인 로자 파크스(Rosa Parks)의 경우와 최근의 한 사건을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파크스는 1955년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 사건은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1964년 공립학교와 대중교통에서의 인종분리를 위헌이라 판단하는 대법원 판결을 끌어냈다. 덕분에 이제 대중교통에서 인종분리를 요구당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올 2월 ‘백인지역’에서 조깅을 하다가 백인의 총을 맞고 죽은 아버리 사건은 비공식적인 인종적 분리선이 흑인에게는 생사를 가르는 선이 될 수 있음을 웅변한다.

 

과거에도 백인경찰이나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흑인을 살해한 끔찍한 사례들이 많았다. 가령 파크스와 함께 1960년대 시민권운동을 촉발한 에멧 틸(Emmett Till) 살해사건이 그렇다. 1955년 14살의 흑인소년 틸은 백인여성을 희롱했다고 해서—나중에 당사자가 꾸며낸 말이었음이 밝혀짐—남편 형제들에게 납치되어 신체를 절단당한 뒤 총살되었다. ‘짐 크로우’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주는 틸의 린치 사건은 백인여자를 성적으로 농락하는 흑인남자는 법원에 가기 전에 죽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보여준 사례다. 그런데 틸의 린치 사건을 플로이드나 브룩스 살해사건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가혹한지 가늠하기 힘들다. 한가지 뚜렷하게 다른 점은 최근의 두 희생자들은 틸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보복심 같은 인간적인 원한 때문에 살해당한 것이 아니라 공권력에 의해 행정적으로 폐기당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플로이드는 담배 사는 데 20달러 위조지폐를 사용한 혐의를 받았고 브룩스는 음주운전 혐의를 받았는데,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저항했다고 해서 간단히 죽임을 당했다. 두 사람은 가난한 흑인이라는 이유로 ‘폐기처분’된 것이며, ‘쓰레기’ 취급을 받은 것이다.

 

1960년대 운동이 흑백 간의 불평등에 대한 저항의 형태를 띠었다면 오늘날의 운동은 그 대표적인 운동단체명이자 구호인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가 시사하듯 흑인 생명을 수호하는 데 초점이 가 있다. 역으로 말하면, 최근의 체제는 예전처럼 흑인을 비롯하여 소수민족, 사회적 약자들을 불평등한 관계 속에 붙잡아두고 계속 착취하려 들기보다 쓸 만큼 써먹고는 아예 관계를 끊어버리고 마치 일회용 물건처럼 폐기처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재생산 없는 축적’ 혹은 ‘강탈에 의한 축적’ 방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징벌적) 신자유주의’라 불리는 자본주의체제의 말기형태와, 더욱 의미심장하게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백인들의 대응체제인 ‘정착식민주의’(settler colonialism)와 연결된다.

 

미국은 ‘근대의 자식’이라는 말처럼 처음부터 자본주의체제로 시작했고 백인우월주의 권력은 흑인 노예제를 주효하게 활용했다. 그런데 원주민인 아메리카인디언에 대해서는 노예화하는 대신 학살하거나 ‘보호구역’ 내에 가둬놓는 방법을 택했다. ‘정착식민주의’의 주요 논자인 베라치니(L. Veracini)에 따르면, 미국이 최근에는 아메리카인디언 외에 다른 거주민들에 대해서도 이런 관계의 중지(제거/봉쇄)를 실행하면서 “흑인들을 점점 더 아메리카인디언들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들 역시 원주민처럼 격리/제거되고 있음은 미국 교도소가 점점 비대해지면서 인구대비 엄청난 수의 흑인들을 가둬놓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교도소는 점점 ‘흑인 보호구역’으로 변하고 그 바깥의 가난한 흑인들은 언제든지 폐기처분될 수 있다.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에 대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태도는 이참에 부양하기 부담스러운 인구는 폐기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흑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빈곤층과 사회적 약자, 노년층이 압도적인 비율로 희생당하고 있는데도 무리하게 경제 재개를 감행하는 것도 정착식민주의식 제거/봉쇄에 해당한다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아빠가 세상을 바꿔놓았어’라는 플로이드의 딸 지아나(Gianna)의 말처럼 플로이드의 죽음 이후 들불처럼 번진 항의시위가 ‘체제적 인종차별주의’와 ‘정착식민주의’적 제거/봉쇄 방식에 강하게 맞섬으로써 모두가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희망의 거점을 확보해나가고 있다. 이 항의시위가 미국 흑인에게만 울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근대의 국가들 모두 이런저런 인종차별주의에 연루되어 있거니와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처럼 원주민 문제가 심각한 곳도 적잖고, 무엇보다 정착식민주의적 ‘재생산 없는 축적’ 양식에 시달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불완전 고용’(underemployment) 노동자 대부분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닌다. 최근 노예거래를 주도한 인물들과 아울러 콜럼버스 같은 식민주의자의 상을 끌어내리는 것이라든지 호주에서는 플로이드처럼 ‘숨을 쉴 수 없어’를 외치고 죽은 원주민 데이비드 덩개이(David Dengay)를 추모하는 시위가 열렸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부디 이 시위가 시민권운동을 넘어―한국에서 세월호참사 이후의 촛불혁명이 그랬듯이―인종과 젠더, 계급과 관계없이 돈보다 생명이 소중한 세상, 모두가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는 새세상 만들기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한기욱 /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인제대 교수

2020.6.1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