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트럼프라는 재난, 또는 과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금방이라도 미국 대선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시간이다. 순조롭지 않을 수 있고 나아가 순조롭고 말고 하는 차원을 넘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경고도 있으나, 미국을 위해서나 우리 모두를 위해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엄청난 사전 투표율이 나타내듯 미국인들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고 미국 바깥의 사람으로서도 이번 선거는 전보다 더 유의해서 지켜보게 된다. 이 선거가 낳을 정치적 파급과 국제적 영향, 한반도 상황과의 연관성에 관해 여러 진단이 나왔고,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부터 해당 분야의 구체적인 분석은 더 많이 쏟아질 것이다. 비전문가인 입장에서는 투표 직전까지 대다수 전문가들도 확답하길 마다했고 더구나 이제 조만간 밝혀질 결과를 예측하는 건 부질없다 못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설사 곧 현실정치에서 이 인물을 진지하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해도, 트럼프라는 미국의 재난 또는 과제를 새삼 되새길 이유는 남아 있다고 느낀다.
그가 재난이라는 점은 실로 어마어마한 미국의 코로나바이러스 확진자/사망자 수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바이러스 그 자체를 제외하면 그토록 많은 시민들의 죽음과 고통에 무엇보다 그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나날이 갱신되는 기록을 외면하며 한풀 꺾이고 있다느니, 모퉁이를 돌고 있다느니, 백신 개발이 코앞이라느니 하는 가짜뉴스로 2차 가해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미 숱한 개탄을 촉발했지만, 그가 최상급 치료를 받고 병원에서 나온 다음 마스크를 벗어젖히며 의기양양하게 코로나바이러스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것이 삶을 지배하게 두지 말라고 역설하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바다 건너 이쪽에서도 절로 한탄이 새어나오며 적어도 내 나라 일이 아님에 안도하게 된다.
그밖에도 그가 왜 미국의 재난인지 보여주는 증거는 차고 넘치며 그에 대한 폭로와 조롱과 비난도 숱하게 쌓여왔다. 「신곡」을 쓴 단떼에게 잠시 ‘빙의’하여 트럼프의 사후 운명에 어떤 지옥이 가장 어울릴지 짐짓 세심하게 논한 글마저 설득력 있다(Ariel Dorfman, “Trump‘s Divine Fate”). 그러나 트럼프라는 재난으로 물질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며 토해낸 이 비판들에 대체로 공감하면서도, 동시에 너무 열렬히 몰입하게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직접 겪는 일이 아니어서, 너희도 고생 좀 해보라는 심사가 들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트럼프를 공격하는 일이 트럼프라는 과제를 해결하는 일과 같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트럼프가 일종의 재난이라면 우리 모두가 겪는 지금의 이 재난, 팬데믹과 비교해도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팬데믹을 두고 흔히 더 큰 위기의 리허설이며 이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트럼프 자신이 극구 묵살하는 이런 깨달음이야말로 트럼프를 바라볼 때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4년을 겪은 이후에도 그가 여전히 다음 임기를 시작할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사실이며 그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리버럴한’ 사람들이 무엇보다 참아내고 대면해야 하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를 두고 미국 내부에서는 ‘건강한 리버럴’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보수’를 회복해야 하는 문제라는 말이 있고 그 논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탈을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문제라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이제껏 정상으로 여겨온 것이 팬데믹을 야기했듯, 트럼프를 낳은 것이 다름 아닌 ‘건강한’ 리버럴의 세계였거니와 그는 ‘건강함’의 선을 당당히 위반함으로써 그 선이 얼마나 허약하며 어딘가에서 얼마나 간단히 무시되어왔는지 실증해주었다. 은밀한 잠식보다는 정직한 파괴가 낫다는 사람들, 트럼프보다 건강한 리버럴을 더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온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건강한 보수라는 것이 설사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낳는 것은 ‘대체로’ 또는 ‘비교적’ 선을 지키는 건강한 리버럴일 리 없으며, 스스로의 건강함에 그나마 충실하려는 리버럴이라면 트럼프가 자신의 진정한 짝패임을 인정해야 한다.
일찍이 영국 작가 D. H. 로런스는 『미국고전문학 연구』라는 책을 통해 19세기 미국문학이 보여주는 미국의 ‘진실’을 독특하고도 탁월하게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유를 찾아 유럽을 떠나왔고 그리하여 신대륙 미국에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가 있다고 소리높여 외치는 미국인이야말로 ‘탈선한 유럽인’에 불과하기 쉽다. 하지만 이 탈선에도 그 나름의 역할이 있는바, 그것은 민주주의를 포함한 유럽의 낡은 삶이 갖는 ‘절반의 진실’을 교묘히 파괴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로런스의 논법을 빌려 말하면, 트럼프로 상징되는 ‘탈선한 미국인’은 멀쩡한 미국이 이미 탈선한 상태라는, 세계의 나머지는 이미 짐작하던 그 사실을 비로소 미국인들 스스로에게도 부인할 수 없도록 가시화해주었다.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산다는 것이 미국식 자유에 늘 따라붙는 이미지가 아니었나. 트럼프는 다만 그렇게 살자면 눈에 거슬리는 것을 (무엇보다 자유로이 소지한 총기를 사용하여) 쓸어버리는 일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 아닐까. ‘아무것도 너를 지배하게 두지 마라’에서 ‘팬데믹이 너의 삶을 지배하게 두지 마라’까지는 기껏 반발짝의 거리다.
그런 점에서 트럼프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더는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가 백악관에서 사라진다 한들 저절로 해소되지 않은 이 재난의 현상은 민주주의를 위해 질적으로 새로운 인식과 다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팬데믹이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가리키는 것은 팬데믹이 부득이 만들어낸 변화, 그래서 팬데믹이 사라지는 순간 되돌려질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팬데믹이 다시 도래하지 않도록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일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무엇이 그럴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이 질문은 트럼프를 하나의 과제로 받아들이자는 주장과 다름없으며, 자유주의의 한계와 민주주의의 도약에 관련되는 한 이 과제 역시 미국인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황정아 / 문학평론가, 한림대 한림과학원 HK교수
2020.11.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