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다시, 민주주의가 논란이 되고 있다. 공수처법 개정안 통과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은 “민주주의의 새 장이 열리는 역사적인 시간”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반대 입장에 선 야당은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운운하면서 강하게 반발했으며, 법안 표결에 기권표를 던진 정의당 장혜영 의원도 “민주주의 없이 검찰개혁도 없다”라고 했다. 필자는 민주주의와 민생경제는 하나의 체제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하위요소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보면, 공수처법을 민주주의체제의 핵심문제로 여기는 논박 속에 과연 민생이 얼마나 고려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즉 검찰개혁을 둘러싼 갈등이 지속되는 동안 한국경제와 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는 경시되고 있다는 것, 이것이 현 단계 ‘위기’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를 진지하게 말하려면 민생경제를 포함하는 더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은 전쟁과 분단의 곤경을 뚫고 경제와 민주주의를 함께 진전시키는 ‘기적’의 길을 개척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한국은 구조변동의 압력에 직면했고, 코로나19 위기는 구조변동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구조변동의 핵심은 지역과 세대라는 두개 차원에서 분기(divergence)가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열들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당면 과제이다. 구조적 과제를 외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위기’를 말해주는 일이다.
지역적 분기는 한국전쟁 이후 형성된 경제체제와 정치체제의 구조적 변동의 핵심요소이다. 한반도 차원에서 보면 남북 간 격차의 확대, 남한 내에서는 수도권 집중이 구조화되었다. 1980년대 말 냉전체제의 이완 속에서 남북 간 경제적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남한 내부에서도 지역적 변동이 급속히 진행되었는데 1960년대에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1970~80년대에는 영호남 간 격차가 빠르게 심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특히 2010년대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가 지역구조에서 핵심요소가 되었다. 정치적 분열의 주요인이었던 영호남 간 지역 갈등구조 외에 수도권으로의 집중에 따른 비수도권의 소외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세대적 분기는 2010년대에 새롭게 등장했는데,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이른바 ‘86세대’와 청년세대의 갈등 문제가 더욱 부각되었다. 세대 간 격차가 객관적으로 심화되는 추세인가를 놓고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노동시장 안팎에서의 청년세대의 고난은 이미 사회적으로 쉽게 관찰되는 현상이다. 저성장과 고용기회 축소, 이중노동시장이라는 구조적 악화, 베이비붐 세대의 노동시장 장기체류 등이 청년세대와 그 이전 세대 간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격차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고 있다.
지역적 분기와 세대적 분기는 1987년 민주화체제의 내부질서를 흔들고 있다. 87년체제의 정치체제는 기본적으로 지역의 정치적 동원에 기반한 것이다. 지역정치를 주도한 것은 보수층으로 이를 뒷받침한 것은 수도권과 영남권(동남권)의 성장연합이었다. 김대중정부, 노무현정부는 리버럴 세력과 중부권 보수층의 연합을 통해 정권교체에 성공했지만, 보수층의 지역정치 기반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명박정부, 박근혜정부는 87년체제의 성장연합을 기반으로 보수 주도의 정치질서를 복원하고자 했다. 특히 박근혜정부는 87년체제 이전의 박정희 모델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을 나타냈고, 2016~17년 촛불혁명에 의해 몰락했다. 광범한 시민적 저항이 다시 분출되었는데, 그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진행된 민주주의의 후퇴를 ‘살게 하는 권력’으로부터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으로의 전환으로 보는 견해이다(김종엽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2010년대 이래 심화된 지역적 분기와 세대적 분기는 ‘죽게 내버려두어진다’고 강렬하게 느끼는 새로운 집단이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박근혜정부는 이 새로운 집단을 무시하고 방치하는 와중에 침몰했다.
권력이 무너진 공간을 채운 문재인정부는 박근혜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그러나 두가지 분기라는 구조적 변동 추세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출범 초기에 해당하는 2017~18년에는 최저임금 인상, 소득주도 성장,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계층 및 소득분배 이슈를 앞세웠으며 노무현정부에서 강조되었던 지역균형 의제는 거의 제시되지 않았다. 또한 최저임금 인상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경영조건과 충돌했다. 노동시장 진입이 어려워진 청년세대는 공정성 이슈에 더욱 민감해졌다.
2020년의 코로나19 위기는 사람들을 살게 하느냐 죽게 내버려두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에 직면하게 했다. 2020년 상반기까지 한국의 방역 성과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위기를 통해 새로운 공공시스템을 구축하려는 비전은 나오지 않았다. 차단의 단계를 수시로 변동하면서 코로나19 확산에 대응해왔지만 8월, 11월에 광범한 지역감염의 파도가 나타났다. 의료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린 채로 1년 가까이 버텨왔으나 이제는 ‘검사, 추적, 치료’의 K-방역 모델이 작동하는 단계를 넘어선 것 같다. 겨울의 대확산 가능성이 꾸준히 이야기되었음에도 의료자원 확보를 위한 체계적 준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환자와 의료진, 자영업자와 비정규직들 앞에 혹독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부동산시장의 위기도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수요억제 일변도의 정책을 펼치다가 이제야 공급대책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10여년간 진행된 지역적·세대적 분기의 추세는 아직도 고려되지 않고 있다. 서울의 과잉수요, 지방의 과잉공급에 대해서는 차별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체계적·종합적 기획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지난 6~7월에는 엄청난 규제 입법이 진행되었다. 보유세와 거래세의 동시 대폭 인상, 부동산 금융의 축소, 주택임대차 3법 개정이 쏟아졌다. 시장규제는 시장을 경직시킨다. 시장 거래가 줄고 가격이 더 비탄력적으로 움직이게 되면 서울, 지방 핵심도시, 그밖의 지역 사이의 격차가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금융과 세제의 장벽이 높아진 시장에 청년층이 진입하기는 더 어려워져서 세대 간 자산 격차도 커질 것이다. 부동산자산 소유계층의 양극화 또한 더욱 심화될 수 있다.
2019년 여름부터 정치권은 검찰개혁을 둘러싸고 갈등을 거듭했다. 그러한 중에 기존 정치권이 대표하지 않는 계층, 지역, 세대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정치권력이 자신들을 ‘살게 하는 권력’이 아니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으면,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위험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핵심적 위기를 외면하는 것,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그동안 흘려보낸 기회와 시간이 아쉽다.
* 이 글은 2020년 11월 12~13일에 열린 스탠퍼드대학 아태연구소의 심포지엄 ‘Is Korean Democracy in Crisis?’의 발표문 “Two Divergences in South Korea’s Economy: Regional and Generational Disparities”에 기반했음을 밝힌다.
이일영 / 한신대 교수, 경제학
2020.12.1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