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년칼럼] 세상의 민낯을 본 뒤에 무엇을 할까
2020년은 정말 길고 힘든 한해였다. 유달리 어수선한 정국에다 전에 없던 코로나19 대유행까지 겹쳐 살림살이가 극도로 힘들어진 세월이었다. ‘세상이 왜 이래?’라는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세상은 늘 이랬고 여러 면에서 더 나쁘기도 했다. 물론 감염병 대유행이 겹친 점이 새롭지만, 이 경우도 주로 예전에 힘들었던 사람들이 더욱 힘들어진 사례가 대부분이다.
‘촛불’이라는 화두와 표준
따라서 ‘세상이 왜 이래?’라는 물음도 그냥 탄식에 그칠 것이 아니다. 지난해 신년칼럼에서 나는 촛불혁명을 섣불리 정의해서 찬반 어느 쪽을 고집하기보다 이를 화두 삼아 연마할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는데(졸고 「촛불혁명이라는 화두」, 『한겨레』 및 『창비주간논평』 2019.12.30), ‘이런 세상’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더욱 그렇다. 민낯들의 드러남이 촛불혁명의 성과인 동시에, 드디어 민낯을 보여준 세력이 이제는 그야말로 ‘안면몰수’하고 나설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으로 가장 일찍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 거대 수구정당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야말로 가장 크게 변한 집단이다. 국민을 속여서 집권하는 게 목적이었고 2007년과 2012년 모두 그 목적을 너끈히 달성했던 정당이 촛불 이후 국민을 속이는 능력뿐 아니라 속이려는 성의마저 상실한 기색이 역력해졌다. 최근에는 2012년 박근혜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입안했던 분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돌아와 다시 국민을 속일 수 있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분투하고 있지만, 그사이 국민의 의식수준이 엄청 높아진 데다 당내에 솔직한 인사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끼리 손발을 제대로 맞춰갈지도 의문이다. 일시적으로 여론의 지지도가 좀 오르더라도 반촛불세력의 지휘부라기보다 누구든 앞장서 정부를 흔들어대는 인사의 써포터즈 역할에 머무는 형국이다.
검찰의 민낯도 온 천하에 드러났다.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전부터 꾸준히 늘어왔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개혁을 추진한 대통령과 정부도 잘 몰랐던 게 분명하다. 그러나 윤석열 총장이 이끈 대대적 반항사태를 지켜보면서 철저한 검찰개혁이 수구정당 제압에 못지않은 시대적 과제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검찰처럼 직접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뿐이지 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최종적 권한을 가진 법관들의 정체도 드디어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그 동네야말로 설마가 사람 죽이는 곳인데, 사실 ‘설마’는 배부른 계층들 얘기이고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일찍부터 그곳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본고장임을 실감해왔다. 아무튼 학습의 소중한 기회를 얻었는데, 이럴 때일수록 관성적인 개탄이나 옥석을 안 가리는 과격한 공격이 아니라 촛불을 표준삼은 냉정한 형세판단과 착실한 제도개혁으로 대응할 필요가 절실하다.
아직 덜 드러난 민낯들
경제관료들, 특히 예산권을 틀어쥔 관료들의 실상도 드러나는 중이다. 한국의 재정건전성이 OECD 국가들 중에서 매우 양호한 축인데도 코로나사태로 거의 사경에 처한 사람들 도와주자고 할 때마다 ‘재정건전성’을 들고나와서 한푼이라도 덜 주려고 한다. K-방역이 진단과 추적에서 모범적인 성과를 내면서도 국민들의 전폭적인 협조를 얻는 데 한계를 보이는 것도, 정부관료가 서민을 ‘죽게 내버려두는’ 속마음으로 재난극복에 임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신을 사기 때문은 아닐까.
이밖에도 우리 사회의 숨겨졌던 진실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다. 언론계가 정직한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대중이 직접 참여한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이 실상을 보도하지 않음을 체득하는 사람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계의 문제가 일부 기자들의 타락, 또는 특정 언론사들의 진실왜곡에 국한되지 않는 현상임을 더 깊이 연마할 시점에 왔다. 이제는 저들의 왜곡보도가 단순한 사실왜곡의 수준을 넘어 촛불정부의 실패를 위한 면밀한 작전의 일환이며 그런 점에서 제1야당보다 대형 수구언론이 반촛불세력의 전략본부로 기능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소위 진보신문이 이에 효과적인 대응을 못하는 것이 단지 물적 자원의 부족과 발행부수의 열세 탓이 아니라, 손쉬운 양비론에 안주하면서 포탈의 클릭 수에 누구 못지않게 집착하는 자세에 기인하기에 이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 배경에는 정권보다 금권이 우위에 선 지 오래된 우리 사회에서 언론인 집단 자체의 체질에 일어난 변화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미진한 공부거리를 열거하자면 한이 없으나 여당에 대한 지적을 빼놓을 수 없다. 민주당이 수구야당과 동일한 수준의 적폐세력은 아니지만 줄곧 우리 사회 기득권구조의 일부로 기능해왔음은 엄연한 사실이며, 의석 180석을 동원할 수 있는 지금도 툭하면 말을 뒤집고 개혁에 발을 끄는 모습은 결코 대충 넘길 일이 아니다. 대통령 자신은 여전히 촛불정부의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믿기에 나는 계속 지지를 보내는 축이지만, 촛불혁명의 개념조차 희박한 고위관료와 여권 정치인들을 제대로 통어하지 못하는 책임마저 불문에 부칠 수는 없다. 이는 정치적 개인기의 문제라기보다 촛불시민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선한 기운을 북돋우는 노력의 문제인 것이다.
근대세계와 ‘중근’ 고비
이런저런 민낯들을 보면서 우리가 반드시 할 일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상식적으로 추론해도 세상이 온통 ‘이런데’ 자신만 온전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각자가 스스로 해온 몫이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한민국을 ‘기후악당국가’로 만드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한 바 있을 것이고, 노동을 멸시하고 생명을 경시하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사회에서 무심코 살아왔다면 그것도 반성하고 참회할 대목이다. 나는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온 우리 내부에도 괴물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라는 주장을 펴왔는데, 분단체제를 포괄하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괴물스러움 또한 팬데믹시대를 맞아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의 교화를 받을 능력과 소질을 근기(根機)라 하고 상‧중‧하 등급으로 나누곤 한다. 물론 하근기라도 수행을 통해 중‧상근으로 진급할 수 있는데 가장 위태로운 것이 오히려 중근(中根)의 고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주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 분별력이 늘고 더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매사를 재단함으로써 상근으로 못 가고 심지어 하근보다 못한 지경에 떨어지기 일쑤라는 것이다.
주변에서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언행을 일삼으며 혼자 똑똑한 척하는 ‘중근병자’들을 식별하기는 어렵지 않다. 반면에 자신이 동조하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부류를 인지하기는 한결 어렵다. 무엇보다 스스로 중근 고개에 걸려 있다는 생각은 중근기일수록 하지 못한다. 이런 때야말로 스승이나 목자, 도반의 일깨움이 필요한데, 우리 시대에는 어떤 스승의 존재보다 촛불혁명의 거대한 흐름을 마음에 모시고 정진하는 것이 중근 고비 넘기의 관건이다.
굳이 불교 용어를 빌려온 것은 근대세계체제야말로 중근병자를 대량생산하도록 설계된 체제라는 생각에서다. 교육의 확대와 지식산업의 발달, 특히 디지털정보기술의 극대화로 하근에 멈춘 인구가 대폭 줄어든 대신, 중근 고개를 넘어 상근기로 진급하는 공부는 공식적인 교육과정이나 교육이념에서 아예 자취를 감춘 형국이다. 아니, 자기 몸을 닦아 인간세상을 평안하게 하는 공부, 스스로 부처가 되어 중생을 건지는 공부,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공부는 진지하게 하면 할수록 손해 보게 되어 있는 세상이다.
촛불혁명을 화두로 삼고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세상에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엄청난 도전이다. 2020년의 고난과 혼란 속에서도 이런 작업이 멈추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감염병 대유행에 대처해온 공동체의 분투, 사회운동, 시민정치, 학문, 예술, 기술 등의 수많은 현장에서 촛불을 화두로 삼은 창의적 노력들이 계속 벌어져왔음을 알기 때문이다.
백낙청 /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2020.12.30. ⓒ 창비주간논평
*이 글은 한겨레 2020년 12월 30일자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