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트럼프 ‘친위쿠데타’ 사태의 교훈
지난 6일 트럼프 지지 폭도들의 의사당 유린 사건은 수렁에 빠진 미국의 민낯만 보여준 것이 아니라 오늘날 자유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심각성도 함께 드러냈다. 냉전 시절 전제주의적인 소련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비전을 내세워온 미국은 지금껏 남들이야 뭐라든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로 자임해왔다. 그런데 바로 그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 선거에서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동조 공화당 의원과 폭도들을 동원한 일종의 ‘친위쿠데타’를 통해 그 결과를 뒤집으려 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중심을 자처하던 미국이 어떻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되돌아보는 것은 촛불혁명으로 어렵게 구원해낸 우리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이번 사태의 배경에 선거제도 같은 미국 특유의 문제도 있지만,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공통으로 직면하고 있는 구조적 문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승자와 패자만 있는 제로섬게임의 현장으로 보고,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텔레비전 리얼리티쇼 진행자가 거침없이 민주주의를 유린할 수 있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몇가지를 들 수 있다. 미국 인종구조의 변화와 기독교 우파 등 보수적 이익집단의 득세, 이들에 영합해 우경화한 공화당, 그리고 그들의 메가폰이 되어준 극우 언론매체와 트위터·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의 영향력 증대가 그것이다.
1960년대 유색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권법을 제정하면서 민주당이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 기반의 진보정당으로 변신하는 사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링컨의 정당이었던 공화당은 백인 및 기독교 우파에 기반을 둔 보수정당이 되었다. 그런데 1950년 90%에 이르렀던 백인 인구 비중은 2019년 60%대로 떨어졌고, 선거구민의 80%에 이르렀던 백인 기독교 신자 비중도 40% 정도로 줄었다. 공화당은 이들 백인의 기득권 상실에 대한 우려를 파고들며 점차 인종주의적 정당으로 변모했다. 공화당 우파 정치인들은 세계화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문제는 백인의 입지를 갉아먹는 유색인 이민’이라며 세계화의 문제를 인종문제로 둔갑시켰다. 이렇게 인종적 다양성과 사회적 다원성에 반대하는 기독교 우파를 비롯한 극우세력을 등에 업으면서 그들은 백인, 특히 공화당의 지지기반인 빈곤지역의 백인을 부와 권력을 장악한 엘리트 집단과 인종적 다양성의 ‘희생자’로 부각시켜왔다. 그 결과, 백인우월주의자 등 극우세력에 점점 잠식당하게 된 공화당은 점차 자유민주주의 규범 파괴세력이 되어갔고 급기야는 트럼프라는 대통령을 낳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폭스뉴스를 비롯한 극우 언론매체와 트위터 등 SNS가 없었어도 트럼프 시대가 가능했을까? 그러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화당 지지자의 70%가량이 본다는 폭스뉴스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선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권기간 내내 충실한 메가폰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이번 의사당 난입 사건조차도 극좌단체가 꾸민 것이라는 음모론을 전하는 등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또 트럼프가 8000만명의 팔로워를 거느렸던 트위터나, 2500만 팔로워를 거느렸던 페이스북도 지난 4년 내내 트럼프의 거짓말을 확산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트럼프의 거짓말을 막으라는 요구가 비등했지만, 그들은 표현의 자유 또는 뉴스성 등을 이유로 이를 거부해왔다. 그들이 트럼프 계정 중단 등의 조처를 취한 것은 의사당 난입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야였다. 그사이 큐어넌(QAnon)과 같은 음모론 집단이 거짓증거를 활용해 음모론을 만들면, 트럼프와 공화당 지도자들은 이 주장에 동조해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폭스뉴스 같은 우익매체와 SNS가 확산시키는 구조를 통해 미국 사회는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탈진실의 시대로 들어가버렸다. 공화당 지지자의 40%가량이 선거부정이 있었다고 믿게 된 것은 이런 상황 때문이다.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Snyder) 예일대 교수의 말처럼 “기본적 사실에 대한 합의가 없이는 시민들이 그들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구성할 수 없”(“The American Abyss,” 뉴욕타임즈 2021.1.9.)기 때문에 탈진실은 파시즘의 전초가 된다.
트럼프의 친위쿠데타는 의회가 바이든의 승리를 공식 인정함으로써 일단은 실패로 귀결됐다. 하지만 당장의 현실을 보면 미국 사회의 파시즘화 우려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속단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사태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는 공화당 지지자의 45%가 폭도들의 행위를 지지하고, 30%는 이들을 애국자로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인우월주의자, 음모론자, 복음주의 기독교인 그리고 민병대 등으로 이뤄진 폭도들이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앞으로 더욱 폭력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기에 더해 이들의 분노를 활용하려는 정치세력도 여전히 존재한다. 의사당이 폭도에 의해 점거되는 충격적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선거결과 인정을 거부한 147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그들이다. 또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버팀목으로 여겨졌던 삼권분립의 견제와 균형의 장치 역시 트럼프 치하에서 심각하게 훼손돼버렸다. 비백인에 바탕을 두고 진보정당임을 내세우는 민주당은 경제적으로는 부자 등 기득계층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경제적 약자들을 극우세력의 먹잇감으로 만들어온 책임이 있다. 바이든 정부가 앞으로 4년 동안 트럼프가 저질러놓은 이런 난장판을 치우고,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마음을 보듬어 그들을 극우세력에서 분리해냄으로써,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복원해내느냐에 미국 민주주의의 장래가 달려 있다.
문제는 이런 미국의 상황이 먼 나라의 이야기만 아니라는 데 있다. 미국의 인종문제처럼, 우리의 분단상황도 ‘태극기부대’와 같은 극우세력이 활개 칠 수 있는 온상을 제공한다. 또 그런 극우세력과 절연하지 못한 보수정당이 존재하고 정치공학적으로 그들을 이용하려는 정치인들도 여전히 세력을 이루고 있다. 폭스뉴스처럼 스스로 정치 행위자로 나선 언론매체와 거짓말과 음모론을 무차별적으로 확산하는 SNS를 통해 우리 사회 역시 탈진실의 시대에 진입했다. 갈수록 심화되는 사회경제적 양극화에 대한 절망감 역시 만연해 있다.
물론 우리에겐 아스팔트 우파를 비롯한 극우세력과 결탁한 박근혜의 ‘점진적 쿠데타’ 시도를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촛불혁명의 경험이 있어 미국과는 다르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한층 더 포용적이고 형평성 있는 공정한 사회로 만들지 못한다면, 언론과 SNS가 영향력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견인해내지 못한다면, 보수정당이 정치공학적 고려를 버리고 극우세력과 절연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리고 극우의 온상으로 작용하는 분단체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촛불혁명으로 지켜낸 우리의 민주주의도 내내 안전할 것이라곤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권태선 / 언론인
2021.1.1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