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미얀마에 찾아온 두번째 쿠데타와 미얀마 민중의 저항
지옥 같은 일요일이었다. 지난 14일 미얀마 양곤에서 74명의 시위자가 목숨을 잃었다. 당초 “최소 38명”이라고 알려졌던 사망자는 확인 결과 그 두배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쿠데타 42일차, 가장 피비린내 나는 날이었다. 양곤 북서쪽에 위치한 흘라잉타야 공단의 두 공장에서는 방화도 일어났다. 군대는 인근에서 시위하던 노동자들을 강경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22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시민들이 시위 도중 목숨을 잃었다. 국제사회에서 사면초가에 몰린 군부가 내부 저항을 짓누름으로써 사태를 일단락지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미얀마 정치범지원협회에 따르면 3월 16일 기준 사망자 수는 180명을 넘어섰다.
2008년 개정된 헌법을 바탕으로 시행된 20년 만의 선거를 통해 2011년 친군부 정당 연방단결발전당(USDP)이 권력을 쥐었다. 1988년 8월 민주항쟁의 주축들이 결성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도 이듬해인 2012년 4월 보궐선거에 참여해 의회에 진출했다. 그리고 2015년 11월 선거 결과 아웅산수치(Aung San Suu Kyi)를 위시한 NLD가 집권해 사실상 첫 민선정부가 수립되었을 때(이 선거에서 NLD는 491석 중 390석을 차지했다) 사람들은 비로소 미얀마에도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애초 이것은 이뤄질 수 없는 기대였다.
첫번째 원인은 정치 구조의 모순 때문이다. 개정 헌법에 따르면 군부는 상·하원 의회의 25퍼센트를 자동으로 할당받을 수 있다. 양원과 군부는 각 1명의 부통령을 임명하고, 상원은 이 셋 중 1명을 대통령으로 지명하는데, 이 때문에 군부는 무조건 1명의 부통령을 차지하고, 나아가 군 최고사령관이 역으로 국방장관·내무장관·국경장관을 임명할 수 있다. 심지어 군의 최고통수권은 대통령이 아닌 사령관에게 있고, 아무 때나 긴급권을 발동할 수 있다. 이 헌법상 민선정부나 국민들은 어떤 방법을 강구해도 75퍼센트 이상의 찬성 표를 필요로 하는 개헌이 불가능하다. 이번 쿠데타에 대해서도 군부는 자신들이 헌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조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두번째는 경제적 모순이다. 1990년대 이래 군부는 자원추출이나 중공업·농업 등에서 자신의 이익을 확고히 다져왔다. 민영화를 통해 군부 엘리트들에게 이권을 분배했고, 정실 자본가들과 강력한 유착관계를 맺었다. 더구나 군부는 외양상 민선정부가 존재해야 서구 자본의 투자를 유치하기 좋다는 걸 알았다. 서구의 오랜 경제제재는 더 많은 이윤을 방해할 뿐이었고, 문을 굳게 걸어 잠근 국가자본주의 형태가 군부의 이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얀마를 위한 정의’(Justice for Myanmar)는 주요 산업에서 발생하는 이윤이 어떻게 해서 군부로 흘러 들어가는지에 대한 구조적 모순을 분석하고 폭로해왔다. 이에 따르면 미얀마 군부는 이동통신, 부동산 개발, 천연가스 추출, 무기 수입과 군수품 조달, 마약 거래상으로부터의 수수료 등에서 막대한 이윤을 거두어 장성들끼리 나눠 갖고 있다.
미얀마 군부는 매우 독특한 이익집단이다. 이들은 강력한 부와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도 언젠가 그것을 모조리 빼앗기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지난해 총선 결과는 군부 내 엘리트들의 이런 불안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했다. NLD는 이번에도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USDP가 상원 6석, 하원 23석을 차지한 데 비해, NLD는 상·하원 합계 396석을 차지했다. 경제난에 대한 책임으로 NLD가 승리하기 어려울 거라고 봤던 군부는 이제 어쩌면 자신들의 권력이 위협받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부정선거라는 시빗거리를 만들어 갈팡질팡하던 끝에 쿠데타를 감행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세번째는 역사적 모순이다. 미얀마는 영국의 오랜 식민지였고, 삼사십개의 크고 작은 민족이 존재하는 복잡한 나라다. 135개라는 주장도 있으나, 오랫동안 미얀마 사회를 연구해온 버틸 린트너(Bertil Lintner)는 그것이 정부에 의해 부풀려진 것이라고 말한다. 독립 과정에서 미얀마에 주어진 가장 큰 숙제는 지역별로 나누어진 각 소수민족들이 합의하는 통치체제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1947년 12월 체결한 팡롱협정은 각 소수민족의 자치를 바탕으로 하는 연방제를 표방한 바 있고, 건국 영웅인 아웅산 장군은 이 협정의 정당성에 근거해 1948년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한데 건국 14년 만에 국방장관 네윈(Ne Win)을 주축으로 일어난 군부 쿠데타는 이 모든 합의를 뒤집어버렸다. 군부정권은 중앙정부에 이견을 드러내온 미얀마 공산당을 강하게 진압했고, 소수민족 반군과 잔혹한 전쟁의 시간을 가졌다. 우누(U Nu) 정부의 정치적 무능력이 빚은 ‘국가 만들기’의 실패가 반대급부로 군부에 막강한 권력을 안겨준 것이다. 네윈 군부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상 그것은 후진적이고 아마추어적인 국가자본주의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농업 부문의 공납을 통해 산업화 동력을 만들겠다는 경제전략은 농민에 대한 수탈로 귀결했다. 더구나 모든 권력은 ‘인민’이 아니라 ‘군부’에만 주어졌다. 군부의 국유화 조치는 경제구조의 변혁이 아니라, 영국과 중국인들이 소유했던 경영권을 그저 군부 관료들에게 넘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참여 역시 언감생심이었고, 엘리트들의 비전문성과 비민주성은 자원을 적절하게 분배할 능력이 없었다. 군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혁명’은 민주성을 결여했고, 설사 ‘버마식 사회주의’가 진심이었다고 할지언정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지난 2월 1일 쿠데타 이후 미얀마는 전쟁과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군부에 맞선 저항이 본격화된 것은 2일 밤부터다. 시민들은 테라스나 창문가에서 냄비 등 물건을 들고 소음 시위를 벌였다. 지나가던 차량들도 경적을 울리며 이 행동에 동참했다. 탱크의 무게에 짓눌려 움츠려 있던 시민들은 용기를 갖기 시작했고, 거리로 쏟아져나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집 밖으로 나와 냄비와 그릇을 두드리고, 1988년 항쟁 이래 대중봉기가 폭발할 때마다 불리던 「세상은 끝나지 않을 거야」를 불렀다. 이튿날에는 30여개 도시 70여개 병원에서 의료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의사와 간호사 등 노동자들은 빨간 리본을 달고 손가락 세개를 들어 저항할 것을 표명했다. 미얀마 출신의 인류학자 제프리 아웅(Geoffrey Aung)은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일찌감치 저항을 시작했고, 의류제조업 노동자들이 초기 대중 시위를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설명한다.(“Keep the Streets: Coup, Crisis, and Capital in Myanmar,” SPECTRE, 2021.2.20) 그는 서구 언론들이 주목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런 논리가 공공부문 및 봉제공장 노동자들의 결정적인 역할을 가리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는 분명 학생이나 지식인들이 중심에 섰던 1988년이나 승려들이 앞장섰던 2007년의 민주항쟁과는 다른 모습이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가 부각되는 점도 인상적이다. 시위 초기 군부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19세 여성의 죽음은 수많은 이들의 슬픔과 분노를 자극했다. 여성 노동운동가 마모에 산다르민(Ma Moe Sandar Myint)은 『자코뱅』과의 인터뷰에서 “모든 역경을 무릅쓰고,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 싸우고 있다. 특히 봉제노동자연맹의 지도자는 대부분 젊은 여성들이다. 이들은 투쟁에 시간과 에너지를 바치며 희생하고 있다. 심지어 이혼도 기꺼이 감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Myanmar’s Labor Movement Is Central to the Fight Against Authoritarianism,” Jacobin, 2021.3.2) 2000년대 이후 미얀마 경제를 이끄는 봉제업 노동자의 90퍼센트는 여성이다.
미얀마의 노동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과도기적 권력구조 재조정이 이루어지던 2011년 10월, 노조 설립과 파업권을 보장하는 노동조직법이 만들어졌고, 2012년 3월에는 노동쟁의법을 만들어 제한적이나 쟁의행위가 가능해지고 부당노동행위 역시 금지됐다. 최소 30명 또는 사업장 내 10퍼센트 이상이 가입하면 노조 설립이 가능해졌다. 이후 미얀마 노동운동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3년 7월 기준 등록된 노동조합은 600개를 넘어섰고, 15만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조직되었다. 독특한 점은 이 중 절반이 농업노동자들이라는 점이며, 사업장보다는 지역 기반의 성격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지역 기반 노조들은 지역사회의 피지배계급을 기반으로 하며, 일상적이고 비공식적인 정세로부터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행동력을 발휘할 요소를 안고 있다. 이런 점은 미얀마 노동운동의 능동적 성격을 강화했다. 최근 쿠데타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이 강조되고 나아가 봉제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활약이 부각되는 것은 이와 같은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미얀마에 봄은 올 것인가? 잔혹한 탄압이 이뤄지고 있지만 미얀마인들은 아직 저항을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무기한 총파업을 결의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한 시민들이 각자의 얼굴로 거리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1988년과도 다르고, 2007년과도 다르다. 물론, 광주와도 다르고 홍콩과도 다르다. 공연히 동일성을 직조하려 하기보다, 우리와는 무엇이 다르고 어떤 모순에 맞서고자 하는지 면밀하게 살펴볼 때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지 않을까?
홍명교 / 플랫폼C 동아시아팀 활동가
2021.3.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