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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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바이러스가 아니라 인류가 주인공이다

이향규

이향규

팬데믹 일년, 게임이라면 벌써 끝났다

 

전략 시뮬레이션 모바일게임 ‘전염병 주식회사’(Plague Inc.)에서 주인공은 병원균이다. 팬데믹을 만들어 전인류를 멸망시키면 이긴다. 마지막 남은 인간이 죽기 전에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면 진다. 영국 게임개발사 ‘엔데믹 크리에이션’에서 2012년에 출시한 실시간 전략게임이다. 코로나19로 새삼 각광받으며 2020년 초에는 여러 국가에서 모바일 유료게임 1위를 기록했다. (중국 정부는 2020년 2월에 이 게임을 검열하고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우리 아이도 한국에서 초등학생 때 많이 했단다. 병원균의 종류, 초기 발생 국가, 감염경로 등을 선택할 수 있다. “여러가지를 생각해야 해. 어떤 병원체인지, 그러니까 박테리아인지, 바이러스인지, 기생충인지, 곰팡이인지. 뭐로 옮기는지, 공기 물 새 쥐 그런 거. 이 병원체가 뭐에 강하고 뭐에 약한지 그 특징도 알아서 잘 이용해야 해. 그 특징에 맞게 발생 진원지를 정하는 것도 중요해. 유동인구, 국경, 항공이나 선박 같은 국제여객 상황을 고려해서 빠르게 전파시킬 방법을 찾아야 해. 백신이 나오면 망하거든. 시간 싸움이야.” 병원체가 되어 팬데믹을 만들고 인류를 절멸시키는 게임. 아이들은 거의 10년 전부터 이런 게임을 하면서 놀았다. 게임이었던 이 세계가 2020년, 현실이 되었다. 게임대로라면, 백신이 개발되었으니 이젠 인류의 승리로 ‘게임 오버’다.

 

게임 체인저, 백신

 

2020년 12월 8일, 영국에서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한국도 올해 2월 26일부터 접종이 시작되었다. 코로나19의 위세는 크게 꺾였다. 영국의 경우 지난 두달 동안 신규감염자 수와 사망자 수가 90퍼센트 이상 줄었다. 올해 1월 초만 해도 하루에 신규확진자가 6만명, 사망자가 1200명 나왔는데 3월 초에는 6천명, 120명 수준이다. 하루에 거의 50만명씩 접종해서 지금까지(2021.3.13. 기준) 2400만명이 1차 접종을 마쳤고, 2차 접종까지 끝낸 사람도 거의 160만명에 달한다.

 

남편과 나도 지난 2월 말 화이자 백신으로 1차 접종을 했다. 어떤 백신을 맞을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는 지역 접종센터에서는 화이자 백신을 줬다.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한국에서는 일단 65세 이상 접종을 보류했지만, 영국에서는 처음부터 노인들에게도 AZ백신을 접종했다. 지금까지 1000만명 넘게 이 백신을 맞았는데 부작용이 큰 것 같지는 않다.)

 

의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 마을 쇼핑센터에 설치한 백신접종센터에 시간 맞춰서 갔다. 감개무량한 백신 접종이어야 하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끝났다. 투명한 병에 든 투병한 액체는 순식간에 주입되었다. 그 일을 능숙하게 한 의료진에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백신 접종을 의사만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어떤가요?” 모르는 것처럼 물었지만,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동유럽 억양이 강한 여자가 말했다. “정말요? 의사만 할 수 있다고요? 여기서는 대부분 간호사들이 하죠. 물론 접종 전에 주의할 점 등에 대해 훈련을 받았고 의사의 지시를 따르죠. 그래도 간호사가 해요. 의사는 더 힘든 환자를 돌봐야 하잖아요.”

 

그날 아침 한국 신문에서 대한의사협회가 의사법 개정(살인·성폭력·강도 등으로 금고형 이상을 선고받을 경우 의사면허를 박탈하는 것)에 반대해 접종 파업을 할 수도 있다는 것과, 이를 우려해서 한의사협회가 접종에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간호사 등 의료 인력이 백신 접종에 참여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한국에서 의사가 가진 특권적 지위가 새삼스러웠다.

 

어쨌든, 우리는 간호사에게서 백신 접종을 받았다. 다음 날 접종 부위가 조금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한나절을 넘기지 않았다. 백신을 맞았다는 것이 주는 심리적인 위안은 대단하다. 비 오는 날 우산을 펼친 기분이다. 경험한 바는 없지만, 방탄조끼를 입은 느낌도 비슷할 것 같다.

 

누구에게 먼저 주어야 하나

 

접종 우선순위는 나라마다 큰 틀에서는 비슷하고, 소소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다. 영국에서는 1단계 접종의 목표를 감염에 의한 사망을 줄이고, 의료와 복지 인력을 보호하는 것에 두었다. 순서를 이렇게 정했다. ①요양원 거주 노인과 돌봄 종사자 ②80세 이상 노인, 의료진 및 복지관련 종사자 ③75세 이상 ④70세 이상, 임상적으로 감염에 매우 취약한 개인 ⑤65세 이상 ⑥16~64세 만성질환자 ⑦60세 이상 ⑧55세 이상 ⑨50세 이상 인구. (나는 나이 덕분에 이 끄트머리에 속했다.) 1단계 대상자의 접종이 완료되면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의 99퍼센트를 막을 수 있다고 예측했다. 2단계는 그외의 연령집단(18~49세)을 나이순으로 접종한다.

 

영국의 ‘백신면역공동위원회’(JCVI)는 이 원칙을 따르되 지역에 따라 상황에 맞게, 특히 ‘건강 불평등’(health inequality) 상황을 고려하여 유연하게 실행하라고 제안했다. 이를테면 인종적 소수자(BAME; Black, Asian, Minority Ethnic)가 감염에 취약하다는 우려가 크다. 이들은 팬데믹 상황에서도 배달이나 간병처럼 지속적으로 대면노동에 종사하고 밀집된 주거환경에서 생활하며 언어나 문화적인 이유로 백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지역정부는 이들에게 백신 접종을 적극적으로 홍보해야 하고 필요하면 이들을 우선 접종대상에 포함시킬 수 있다.

 

방역, 경제, 그리고 평등

 

‘건강 불평등’ 문제가 자주 제기된다. 영국의 의료윤리학회지에 실린 「코비드19 백신의 윤리적 배분」이라는 논문(Rohit Gupta, Stephanie Morain, “Ethical allocation of future COVID-19 vaccines,” Journal of Medical Ethics, Vol.47, 2021)에서도 코로나19 백신 접종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과 사망을 줄이는 것’ ‘팬데믹으로 인한 추가적인 사회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과 함께 ‘건강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을 비롯해서 많은 국가들이 지난 일년 내내 ‘방역’과 ‘경제’라는 두가지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다. 여기 한가지 중요한 가치가 더 있었다. 우리가 쉽게 잊어버리는 가치는 ‘평등’이다. 잉글랜드의 몇몇 도시에서 홈리스를 접종 우선대상에 포함했다고 기사를 읽었다.(“GPs and councils prioritise homeless people for Covid vaccinations,” PULSE, 2021.1.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이후에, 처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취약집단이 드러나서 우선순위에 포함한 경우도 있다. 공공의료시스템에 ‘학습 장애’로 등록된 사람들은 모두 우선 접종되었다.(“All people on learning disabilities resister in England to be invited for Covid vaccine,” The Guardian, 2021.2.24) 이런 소식은 반갑다. 이런 사례가 많아질수록,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바이러스에 맞서는 ‘인류’의 숭고한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엔데믹 크리에이션은 지난해 11월, 게임의 새로운 버전 ‘전염병 주식회사: 치료 모드’를 출시했다. 이번에는 인류가 주인공이다. 병원체가 인류를 절멸시키지 못하게 팬데믹 위기를 관리해야 한다. 상황의 난이도를 선택할 수 있다. ‘캐주얼’부터 ‘매우 어려움’까지 4단계가 있다. ‘캐주얼’ 단계는 전세계가 긴밀히 협력하고, (의료진을 응원하는) 박수소리에 질병이 달아나고, 마스크를 잘 쓰고 다니는 이상적인 (그러나 비현실적인) 상황이다. ‘보통’ 단계는 현실에 가깝다. 정치인들은 대개 무능하고 의료체계는 미비한 편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전문가의 말을 신뢰한다. ‘어려움’ 단계는 지도자들이 과학을 무시하고, 질병에 대해 보고한 댓가로 의사들이 체포되는 사회이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어려운데, ‘매우 어려움’ 단계가 있다. 최고로 어려운 이 모드에서는 사람들이 ‘모두 가짜 뉴스를 믿는다’. 현실은 게임보다 훨씬 복잡하지만, 게임이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가 플레이하는 게임이 너무 어려운 단계가 아니라면 좋겠다.

 

이향규 / 『후아유』 『영국 청년 마이클의 한국전쟁』 저자

2021.3.1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