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공론화 일년과 보궐선거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지고, 조주빈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검거되기 시작한 지 일년이 넘었다.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듯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은 피해자 물색, 개인정보 수집, 신상 유포 협박, 성착취물의 제작과 유포 등 범행의 모의와 실행에 있어 온·오프라인의 폭력이 조직적으로 결합되어 그 피해를 극대화했다. 그 가운데 여성을 살아 있는 ‘인형’이자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로 대하는 남성들의 시선이 드러났다. 단순 합계 26만명에 이르는 텔레그램 대화방 참여자와 한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크고 복잡한 가해자 조직도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디지털 성폭력의 규모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소라넷’의 회원 수, 경찰의 단속을 피해 사이트 주소를 계속 바꾸어 알렸던 소라넷 트위터 계정의 팔로워 수, 2016년 소라넷 폐쇄 이후 ‘제2의 소라넷’으로 불렸던 ‘AV스눕’의 회원 수,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이 유통되었던 ‘웰컴투비디오’의 회원 수가 각각 100만명을 훌쩍 넘었다는 점은 현실을 더욱 적나라하게 반영한다.
여기 또다른 숫자가 있다.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이 공론화된 이후 2020년 3월부터 12월까지 ‘디지털 성범죄 특별수사본부’를 운영한 경찰은 9개월의 집중단속을 통해 총 2807건의 사건을 적발하고, 3757명을 검거했으며, 245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확인된 피해자만도 1154명이었다. 한편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2020년 12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의 상습 제작 시 최대 29년 3개월, 불법촬영 시 최대 6년 9개월(영리 목적 배포 시 최대 18년), 촬영물을 이용해 협박 시 최대 9년의 실형을 선고하도록 권고하는 새로운 양형기준을 발표했다. 또한 재판부는 지난해 3월 검거된 조주빈에게 1심에서 성착취물의 제작·유포, 범죄집단 조직, 범죄수익 은닉 등의 혐의로 45년형을, 함께 기소된 5명의 공범에게는 7~15년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항소하여 2심을 기다리는 중이다. 여전히 성착취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집행유예와 벌금형 같은 가벼운 처벌에 머무는 등 범죄의 심각성이 판결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지만, 성범죄 최초로 ‘범죄단체조직죄’가 인정되는 등 의미있는 변화 역시 있었다. 이러한 숫자들은 디지털 성폭력 실태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한편 디지털 성폭력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변화한 태도 역시 보여준다.
이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그 숫자를 셀 수 없는 n개의 연대가 있다. ‘추적단 불꽃’은 텔레그램 성착취를 발견하고 추적하여 공권력의 수사를 끌어냈으며, ‘프로젝트 리셋’은 텔레그램 성착취 대책을 마련하라며 국회 국민청원을 제기하고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형태의 성착취를 알려냈다. 이들은 대규모의 설문조사를 실시해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더욱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응답 결과를 대법원 양형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텔레그램성착취 공동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은 수사기관과 사법부에 디지털 성폭력 실태를 알리고 입법과 정책화 과정에 참여했으며,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eNd)는 재판 방청을 통해 사법부를 감시했다. 이와 함께 수많은 여성이 탄원서로, 피해자에 대한 지지로, 온라인 공간 감시로, 거리 시위로 여기에 동참했다. 곳곳에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이고 흩어지는 가운데 만들어진 n개의 연대는 숫자 너머의 현실과 범죄의 메커니즘을 드러냄으로써 정치의 의제와 관점 모두를 확장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숫자들을 만들어냈다. ‘n번방 재발방지법’으로 불리는 각종 법률의 개정, 성착취물의 삭제 등 피해자 구제조치 강화, 여성가족부 내 디지털 성범죄 전담 부서의 신설은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다.
물론 이는 시작에 불과하고 변화는 더디다. 무엇보다 ‘안전한 보안’을 보장하는 제2의 텔레그램을 찾아 나선 이들은 게임용 음성 채팅 메신저인 ‘디스코드’와 해외에 서버를 둔 불법 사이트를 통해 여전히 성착취물을 거래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에 대한 혐오와 성적 대상화를 행함으로써 디지털 성폭력을 가능케 한 문화를 지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 특수를 맞았다는 ‘리얼돌’ 시장과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 사태는 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채팅로봇에 ‘20대’ ‘여성’이라는 나이와 성별을 설정하는가 하면, 성인으로 보기 힘든 아이 같은 외양과 말투를 부과해 여성에 대한 왜곡된 전형을 재생산한 ‘이루다’ 개발사 스캐터랩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런 ‘이루다’에 성적 발언을 유도하고, 모욕과 성희롱을 일삼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학습시킨(‘딥러닝’) 젊은 남성 사용자들은 우리 사회가 서 있는 곳을 잘 보여준다.
결국 ‘이루다’에 대한 사용자들의 성희롱과 여성, 여성운동, 성소수자, 장애인에 대한 차별 및 혐오발언으로 챗봇 ‘이루다’의 서비스가 중단되자, 여성들을 비난하기 위해 남성들이 꺼내든 도구는 남성 아이돌 간 가상의 성적 관계를 묘사한 ‘알페스’였다. 알페스가 남성을 성적 대상화한다며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에 22만명이 넘는 이들이 동의했고, 국민의힘 하태경 의원은 알페스 수사를 의뢰하는 한편 알페스 처벌법을 내놓겠다고 했으며, 알페스가 텔레그램 성착취와 유사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많은 남성이 알페스와 텔레그램 성착취를 구별하지 못하고 디지털 성폭력이 왜 잘못된 것인지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여성들이 확장한 정치적 장(場)을 도덕적 비난과 성별 간 세력다툼의 문제로, 또는 ‘쪽수’ 싸움이나 힘의 논리로 축소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정치인들 역시 이러한 모습을 반복하며 변화를 더디게 만들고 있다. 정치인들은 텔레그램 성착취 문제가 최초로 보도되었을 때는 무관심과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며, 사건이 공론화되고 전사회적으로 분노가 폭발한 이후에는 디지털 성폭력 실태에 대한 이해 없이 여론에 떠밀려 국회 국민청원 1호 법안을 졸속 처리했고, 그 이후에는 다시금 무관심으로 돌아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출직 공직자에게 제기된 성희롱 고발로 치르게 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보궐선거에서마저도 성폭력의 재생산에 공모하는 조직문화를 해체하고 젠더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여성들의 열망을 제도정치 내에서 진전시키려는 정치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젠더폭력과 안전에 대한 대응을 구색 맞추기용 정책으로 축소하고, 여성들의 목소리는 지지율이라는 숫자로 계산하고 협상하며, 숫자를 넘어선 정치가 아닌 숫자로 환원된 정치를 펼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여성들이 분노와 좌절, 무관심과 냉소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권력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줄 때,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할 수 있을 때, 정치는 여성들에게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보궐선거가 정치인들이 정치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김소라 / 제주대 사회학과 강사
2021.4.7.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