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신뢰의 침몰을 두고 볼 것인가: 세월호참사 7주년에 부쳐
전국선거 못지않은 관심 속에 서울과 부산의 재보궐선거가 끝났다. 결과는 집권여당의 참패였다. 선거 직후의 소란과 번답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이긴 쪽에선 정권탈환을, 진 쪽에선 아직 말뿐인 쇄신과 반성 끄트머리에 슬그머니 정권재창출을 덧붙이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도 되는 걸까? 이번 선거결과를 짧게 요약한다면, 시민들이 ‘당신들은 촛불정부가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라고 스스로 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심판의 초점은 문재인정부와 ‘촛불정부’ 간의 점차 낮아지는 듯 보이는 ‘싱크로율’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후퇴나 부실한 부동산정책, 어수선한 검찰개혁 문제만 해도 그렇지만 대승을 거두었던 지난 총선 과정에서 이미 드러났듯 집권세력은 기득권 유지에나 골몰하는 선거공학자들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마치 예의 ‘싱크로율 감소’를 단단히 입증하기라도 하듯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없는 세월호참사 7주년을 맞이한다. 더구나 최근 해경은 유가족이 참여하는 선상추모식에 참사 당시 구조 지휘선이었던 3009함을 배정했다가 거센 항의를 받고 행사를 취소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생자가 그토록 많은데 잘못한 사람은 여전히 아무도 없고, 해경은 유족들에게 ‘그때 그 배’를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일이 벌어졌다. 여야를 막론하고 외쳐대는 ‘안전과 민생’이라는 구호—오세훈 시장의 취임 일성도 안전과 민생이었다—의 첫번째 요소인 ‘안전’은 여성혐오범죄와 아동학대, 노동 재해와 소수자 차별 등의 지속된 화제와 맞물려, 더구나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더없이 생생한 현재다. 만약 안전 문제에 대한 우리의 민감도가 유례없이 높아져 있다면 그 가까운 기원은 분명 세월호참사일 것이다. 안전만이 능사는 아니지만 그것마저 보장받지 못해 훼손당한 삶이 너무나 많았고 여전히 많다.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는 바로 거기서부터 붕괴한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라는 감각들이 구조화되는 경로를 자칭 촛불정부가 수수방관하고 있는 동안 말이다.
세월호참사 얘기만 나오면 누구랄 것도 없이 비슷하게 하는 기억하는 장면들이 있다. 시민참여 북펀드를 통해 최근 발간된 김홍모의 만화 『홀: 어느 세월호 생존자 이야기』(창비 2021)는 ‘작가의 말’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2014년 4월 16일 그날의 아침을 기억합니다./‘제주도로 향하는 여객선 침몰’이라는 속보를 봤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계속 뉴스를 확인했는데 ‘전원구조’라는 보도가 떴습니다. 다행이다. 다 구조됐구나. 안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대한민국 최악의 오보였습니다.”(314면) 거의 모든 세월호 추모 행사와 관련 증언, 기록물에서 빠짐없이 그리고 거의 똑같이 듣는 이야기다. ‘가짜뉴스’니 음모론이니 하는 말들이 언제부터 유행을 탔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공론장의 주류 미디어에 대한 점증하는 불신 또한 세월호참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월호참사만으로 촛불혁명이 일어났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세월호참사 없이 촛불혁명이 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쉽지 않다. 그것은 공동체의 신뢰기반을 회복하려는 동료 시민들 간의 열망의 결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이 무엇인지 촛불정부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단박에 정리하기는 쉽지 않더라도 무엇이 촛불혁명을 대의하는 촛불정부답지 않은지는 누구나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만화 『홀』이 잘 보여주고 있듯 “‘가만히 있으라’가 대한민국 전체를 짓누르는 듯했”던 그때 “뭐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150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자기와 같은 마음을 나눌 ‘동료’들의 얼굴이었다. 앞서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의 유가족 육성기록이나 생존자기록이 보여주었듯이 그리고 많은 시인들이 참여했던 ‘생일시’ 프로젝트 등이 말해주듯이 현장에서 당사자, 동료들과의 대면을 통해 감득한 ‘무엇인가’는 미디어로 매개되고 가공된 ‘정보’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SNS든 국민청원게시판이든 손쉽게 정치나 사회 문제에 참여할 수 있고 많은 정보들을 수합해 자신의 판단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면 촛불광장은 아마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엇인가’는 언제나 데이터를 초과한다. 그 ‘무엇인가’의 다른 이름이 바로 신뢰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정치권이 그토록 매달리는 언론이나 여론조사에는 애초부터 포함될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그러니 핵심은 여전히 무엇으로 공동체의 신뢰기반을 재구축할 것인가이다. 현 정부가 다시 촛불정부다워지려는 노력을 경주할 때, 소위 정권재창출이라는 의제가 집권여당의 정권연장이 아니라 시민들과의 ‘대면’ 속에 이뤄지는 촛불정부의 진화형일 때에야 그것은 의의와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를 제쳐두거나 제외한 채로 그런 일은 온전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촛불혁명으로 정부를 교체하고 거짓말처럼 우리는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를 건져 올렸다. 그러나 아직 건져 올리지 못한 무엇인가가 거기에는 남아 있다. 촛불광장에서 구호처럼 불려진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따라 나오거니와 사실 이어지는 대목은 조건절로 이해되어야 한다. 진실은 어떤 경우에도 침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동안만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1.4.1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