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우리 아이들은 대체 어디 가서 배워야 하는가
지난 3월, 내가 일하는 심리상담지원센터에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쌍둥이 자녀가 이번에 특수학교 초등반에 입학했는데, 교육청에서 제공하는 바우처를 센터에서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문의였다. 그 바우처는 ‘특수교육 대상자’를 위한 것으로, 개별화된 교육과정이 필요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기 어려운 재활수업을 정해진 외부 기관에서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어떤 배움이 어려운지 물었다.
“학습에서 특별히 뒤처지지는 않아요. 책 읽기 좋아하고 글자도 쓸 수 있어요. 다만 근육병을 가지고 태어나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때 도와줘야 돼요.”
“아니, 그럼 일반학교를 가시지 않고요.”
“이 지역 초등학교를 열곳이나 돌아다녔어요. 모두 입학을 거절했어요.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다고 했고, 특수학급이 없어서 안 된다고 했어요. 어떤 학교는 무조건 못한다고도 했어요. 특수학교에 가라는 말씀들만 하셨어요.”
엄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피곤함을 숨기지는 못했다.
“지금 다니는 특수학교에서는 아이들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요?”
“이 학교 교육과정과는 맞지 않는다며 일년 후에 일반학교로 가라네요. 그런데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우리 애들은 대체 어디 가서 배워야 할까요?”
몇년 전 시각장애 2급인 큰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가 떠올랐다. 아이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일반학교의 완전통합교육환경에서 다녔고,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에 따라 독서확대기와 시험시간 연장 등을 지원받았다. 처음에 ‘예외’를 낯설어하던 일반교사들도 특수교사가 알려주는 규정에 의해 지원 절차를 따랐다. 그에 힘입어 아이는 또래 비장애아이들과 함께 똑같이 공부했고 똑같이 졸업했다. 그러나 일반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하자 학교에서는 특수학급도 없고 시각장애를 가진 학생이 다닌 적도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입학 상담에서 교감은 아이에게 “이거 보여? 이것도 못 봐? 어휴 이래서 어찌 공부를 하노……”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무례까지 보였다. 이미 통합교육의 경험이 있는 터라 나는 ‘법대로 해줄 것’만을 요청했지만 불쾌함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장애인 등에 대한 특수교육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및 특별한 교육적 요구가 있는 사람에게 통합된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생애주기에 따라 장애유형·장애정도의 특성을 고려한 교육을 실시하여 이들이 자아실현과 사회통합을 하는 데 기여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교육의 책임을 진 국가와 지자체는 학생을 일반학교의 일반학급 또는 일반학교의 특수학급 또는 특수학교에 배치하며, 특수교육 대상자를 배치받은 일반학교의 장은 통합교육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하여야 한다. 특수학급을 설치·운영하고 시설·설비 및 교재·교구를 갖추는 것도 일반학교의 장이 해야 할 임무다. 즉 법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장애인 및 특별한 교육적 요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통합교육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가 있으며, 특수교육 대상자에게 적절한 교육을 할 의무를 지역 및 교육공동체가 지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이 모든 일이 ‘예산’과 ‘관례’에 따라 이루어진다. 예산이 없어서 지체장애인을 위한 엘리베이터 설치는 불가하고, 발달장애인과 감각장애인은 특수학급이 없다는 이유로 입학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일반학교에 입학하더라도 필요한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사-교장-교육장과 실랑이를 해야 하고, 체험학습 배제 등과 같은 ‘사소한’ 차별은 늘 일어나 일일이 언급하고 따지는 일이 피곤할 지경이다. 때로 노골적으로 특수학교로의 전학을 권하기도 한다. 얼마 전 국립 진주교육대에서는 입학사정관이 1급 시각장애인 응시자의 성적을 조작해서 의도적으로 탈락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입학관리팀장은 ‘어떻게 중증장애인이 일반학교의 교사가 될 수 있냐’라며 ‘특수학교 교사가 되면 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섞이면 안 된다는 이 곤혹스러운 태도는 ‘우리가 더 낫다’는 편견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보는 능력, 움직이는 능력, 공부하는 능력에서 비장애인이 더 나으므로 더 우수한 인간이라는 편견. 그런데 정말 그런가? 비장애인의 우월함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큰아이는 일반고등학교에 일년간 다니다가 시각장애 특수학교로 전학했다. 대입에 필요한 적절한 지원이 필요해서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장애인 커뮤니티의 ‘외부인’이 되어 입학식과 학예발표회에 참여했는데 몇 장면이 크게 가슴에 남았다. 인기척이 나면 누구랄 것 없이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하는 장면, 첫인사로 외모 품평 따위를 하지 않는 장면, 서슴없이 손을 잡고 목소리를 들으며 친밀함을 나누는 장면, 중복장애를 가진 학생들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기 식대로 발표 연주를 즐기거나 발표자들이 신나게 연주하는 장면 등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비장애와 장애가 통합된, 모두가 자유로운 순간이 아닌가 싶었다.
몸 움직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도와주면 완전통합 가능한 아이에게 특수학급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수 없다, 입학해도 불이익은 감수하셔야 할 것이다 등의 말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현실은 그래서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다. 게으르고 얄팍한 계산으로 생명의 싹을 서서히 꺾어버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더 낫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관례, 예산, 원칙, 규칙, 절차, 제도와 같은 이름으로 낙인찍고 짓밟고 배제한 그 존재들이야말로, 사실은 이분법으로 서로를 갈라치고 착취하는 이 회색빛 지옥 같은 비장애 중심의 세상에 기어이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라는 걸 왜 우리는 모를까. 그리고 그 꽃씨가 회색빛으로 ‘표준화된’ 우리 깊숙한 곳에, 세상 곳곳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걸 왜 모를까. 이상하다고 밀어낼수록 세상이 더 말라비틀어지고 결국 모두가 사라지는 길이라는 걸 왜 깨닫지 못할까.
봄꽃이 가득한 시절이다. 꽃도 예쁘고, 풀도 예쁘고, 고양이도 예쁘다. 누가 뭐라 해도 피어나는 존재들이 가득하다.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다.
김경림 / 이연심리상담지원센터 대표
2021.4.2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