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투명인간’이었던 어느 청소노동자의 죽음 앞에서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일터에서의 어이없는 산재사망 보도를 보며,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어머니들을 보며, 이 권리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일할 권리라니! 우리는 정해진 곳에서 정해진 시간만큼 노무를 제공하기로 약속했을 뿐 고용주에게 신체포기각서를 건넨 적도 생명을 판 적도 없다. 우리는 고용주에게 우리를 살해할 권리를 판매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여러명의 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한다. 고용노동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0년 한해 동안 822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했다. 역대 최고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라는 구호는 199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주요 투쟁전술 중 하나가 법을 지키는 것(준법투쟁)이었던 것만큼이나 비정상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지난 6월말 또 한명의 청소노동자가 일터에서 사망했다. 서울대학교 관악학생생활관 925동. 여학생 기숙사 중 학생 수가 가장 많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4층 건물에서 그는 공용공간을 청소하고 학생들이 배출한 음식물과 재활용쓰레기 6~700리터를 매일 계단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코로나19로 학생들이 기숙사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발생하는 쓰레기 역시 증가해 노동량과 노동강도가 폭증한 결과였다. 한여름에 다량의 음식물쓰레기가 포함되어 엄청난 무게였을 쓰레기더미를 옮겨야 했던 그는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고용주가 할당한 무리한 양의 노동과 신임 안전관리팀장의 억압적이고 모욕적인 행위들이 건강했던 그의 심장을 멈추게 했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20년 하반기 지역별 고용조사」에 따르면 청소원 및 환경미화원 취업자 수는 1107천 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직업 소분류 중 4번째로 많은 4.1퍼센트를 차지한다. 고용노동부의 『2019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그 평균연령은 59.7세, 여성비는 70.5퍼센트, 평균근속년수는 3.4년, 월간노동시간은 150.1시간, 월 급여는 187만 5천원이다. 또 청소노동자 중 직접 고용 노동자는 27.8%에 지나지 않는다(성민재·안정화 「저임금 일자리의 동태적 변화와 정책과제」, 한국노동연구원 2016, 118면). 청소노동자는 여성, 중고령, 저학력, 간접고용 등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여러 요소가 중첩되는 ‘복합적 차별’의 상황에 놓인 대표적인 직업군이다. 그래서 본인들조차 자신들의 처지를 “(노동시장에서) 제일 밑바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서마저도 여성은 남성보다 임금을 20퍼센트 정도 적게 받는다.
청소노동은 차별받는 노동일 뿐 아니라 그 노동/자의 존재 자체가 인지되지 않는 유령노동이기도 하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에서 한 청소노동자가 신입 동료에게 말한다. “청소작업복의 비밀이 뭔지 알아? 우리를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거야.” 청소노동은 그 공간 사용자와 마주치지 않는 시간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시될 뿐 아니라(그래서 청소노동자들은 대부분 새벽에 출근한다), 심지어 이용자와 마주치지 말라는 지시까지 받는다. 이용자는 청소노동자가 일하는 것을 보더라도 못 본 척한다. 한 청소노동자는 교수에게 인사했더니 인사하지 말라는 면박을 당했다고 한다.
청소노동자는 의사보다 전염병 ‘예방’에 기여하는 바가 더 크다. 우리가 배출하는 온갖 쓰레기와 분비물을 처리하는 청소노동자들이 없다면 우리는 팬데믹의 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청결과 위생이라는 청소노동의 결과물만을 향유하려 할 뿐 그것이 어떤 환경에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는 관심이 없다. 노동/자를 유령화한다는 것은 그 노동자들이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지에 무관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청소노동자들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고강도 노동을 할 뿐 아니라 휴게실이 없어 계단 옆, 창고, 심지어 화장실에서 식사를 해야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팬데믹하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노동경험에 대해 조사한 적이 있다(「복합적 차별과 코로나19 감염위험: A시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팬데믹하 노동경험과 감염경험을 중심으로」, 『도시연구』 19권, 2021). 설문조사에 응한 지하철 청소노동자의 84.4퍼센트가 코로나19 이후 업무가 늘었다고 응답했다. 이전에는 하루 한두번 닦던 곳을 소독약으로 기본 네번씩 닦게 되어 일이 배로 많아졌기 때문이다. 소독약 과다 사용으로 청소노동자가 쓰러지기도 했다. 마스크를 하고 청소를 하다보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흐른다. 여름에는 특히 힘들다. 불특정 다수의 이용객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부 이용객의 비상식적 행위(노 마스크, 침 뱉기, 토사물, 승강장과 대합실의 대소변 등)의 결과물을 처리하며 극도의 감염공포(‘내 일은 감염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긍정 응답비율 96.5퍼센트)를 느끼고 있다. 그렇지만 감염으로부터의 보호조치는 고용형태에 따라 크게 다르다. 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재택근무와 시차제 출근, 보호 가림막 설치 등 철저한 보호가 행해지지만 용역업체 소속인 청소노동자들에게는 “알아서 소독을 열심히 하라”는 지시뿐이다.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물 한잔 마시러 들어가는 것조차 눈치 보이는 상황이다.
조사를 하면서 청소노동자에 대한 노무관리에는 요구와 지시만 있고 관리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고용주/관리자는 코로나19로 청소노동자들이 어떤 위험을 감당하고 있는지, 노동량과 노동강도가 얼마나 증가했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다. 청소노동자를 최저임금 도깨비방망이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일터에서의 급성심근경색은 과로사의 대표적 요인이다. 잠시만 생각해보면 코로나19로 청소노동자의 노동강도가 급증할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번 일은 그 잠시의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아서 발생한 참사다. 유령에게 노동강도는 문제가 되지 않으니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2018년 서울대는 정부 정책에 따라 청소노동자를 직접고용으로 전환했다. 간접고용보다 고용안정성은 높아졌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2019년에 이어 다시 참사가 발생했다. 청소노동/자의 유령화가 중단되지 않는 한 이번이 끝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죽음을 마주해야만 비로소 노동자의 노동환경을 돌아보는 이런 어리석음을 우리는 언제 멈출 수 있을까? 노동자의 권리 부재는 사회의 민주적 질서를 침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차별이 행해지는 공간, 즉 불평등의 공간에 익숙해지는 것은 사회적 불평등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내가 이용하는 공간의 청결함과 안전함이 누구의 어떤 노동의 산물인지 묻지 않고 그 결과만을 향유하려는 태도가 ‘소비자의 권리’라는 말로 포장될 때 그것은 차별을 묵인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권리’란 다름 아닌 사회성원을 젠더, 고용형태, 학력, 연령에 따라 갈라 치고 차별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차별의 칼날은 사회의 민주적 질서를 부식시키고 우리들 자신을 겨눌 것이다. 가장 취약한 지위에 있는 노동자/시민의 삶이 개선되는 것, 청소노동/자의 유령화를 묵인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노동하는 삶을 개선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번의 불행이 일터에서의 차별과 억압적 노무관리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근본적으로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서울대가 더이상 고인과 유족을 모욕하지 말고 교육기관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대응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비통한 마음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김영 / 부산대 교수, 사회학
2021.7.1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