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차별금지법이 먼저다
“둘 중에 한명은 울어도 되겠지?” 부산부터 30일을 걸어 서울 국회의사당에 도착하기 며칠 전, 함께 걷던 종걸(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과 웃으며 말했다. 누가 울까, 이런 농담을 한 건, 그때까지도 국회에서 차별금지법 논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이 없어서였다. 30일 동안 길에서 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여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별하면 안 된다는 뻔한 말만으로는 현실 속 차별을 막아낼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들, 하지만 곁에 선 누군가에 기대 살아온 만큼 자신도 누군가의 곁이 되어주려고 기꺼이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둘 다 울 수는 없었다. 절망할 이유만큼 절망이 허락되지 않는 이유도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로 내가 울래, 내가 더 우아하게 울 수 있다고 뻐기며 웃었다.
국회 앞에 닿기 전날 밤, 법제사법위원회가 차별금지법 국민동의청원 심사를 2024년 5월 29일까지 연장했다는 기사를 봤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올해가 2021년 아닌가? 2022년도 아니고 2024년까지? 이거 21대 국회 회기 마지막 날 아냐?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최소한 언제까지는 마쳐야 하지 않겠느냐며 토를 다는 국회의원 한명이 없었다. 국민동의청원 10만명을 모으려고 밤을 지새던 여름이 떠올랐다. 한껏 치솟던 청원 동의 수가 주춤할 즈음, 처음으로 가족에게 직장 동료에게 차별금지법을 말해봤다는 이야기들이 들렸다. ‘차별금지법’이라는 말을 꺼내는 데 커밍아웃하듯 용기를 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동의 수가 다시 올라갔다. 그런 용기들을 국회는 참 간편하게도 서랍 속에 처박았다. 분해서 울 수가 없었다.
밀양을 지날 때 이런 말을 들었다. “요즘 세상에 차별이 어딨노?” 차별받아본 사람에게 가장 서러운 건 차별 자체보다 그걸 아무도 몰라주는 것이다. 내게는 차별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는 일들. 용기 내어 항의하면 오히려 ‘네가 문제’라고 말하며 차별을 부인한다. 그래서 차별은 보이지 않는다. 부산에서 서울로 걷는 길에 청도를 지났다. 코로나19 국내 첫 사망이 보고된 청도대남병원이 우리가 지나는 큰길가에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놀랐다. 바스라질 것 같은 몸들이 온돌바닥에 어지럽게 누워 있던 병동 내부 사진을 기억하는 나는 그 병원이 당연히 아주 외지고 인적 없는 곳에 숨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서, 심지어 보건소 바로 옆에서 그렇게 운영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재명 후보처럼 차별금지법이 “당장 닥친 위험의 제거를 위한 긴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끝이 아니다. 행진 기간 중 종걸을 인터뷰한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게재됐다. 평소 잘 보지 않던 댓글을 살폈다. 어떤 응원의 말들이 있을지 설렜던 나의 순진함을 반성했다. ‘니가 어떻게 살든 상관없다, 내 눈앞에 보이지 말아라.’ 그리고 그들은 떳떳하게 말했다. ‘나는 차별한 적 없다’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 모여서 지하철을 탈 때 듣게 되는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보이지 말고 어떻게 살라는 말일까. 학교를 다니지 말라는 건가, 직장을 구하지 말라는 건가, 거리와 광장에 나오지 말라는 건가. “성소수자들은 커밍아웃을 못하니 차별도 못 당한다”는 종걸의 말이 농담일 수만은 없었다.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는 일자리를 피해서 일을 구해야 한다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나 동반자와 함께 살면서도 1인가구가 되어야 하는 동성애자의 이야기. 소수자의 존재를 ‘사회적 합의’의 대상으로 만들고 ‘보이지 말라’는 요구에 가둬둔 것이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가 벌인 일이다.
차별받는 우리, ‘불쌍한’ 우리 좀 봐달라고 애걸할 마음은 없다.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후보들이 세상 서러운 사정들 다 헤아리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리일수록 보려고 해도 보기 쉽지 않은 것이 차별의 속성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자애로운 군주 노릇이 아니다. 누구나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서 사회에 등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책무다. 차별금지법이 필요한 이유다. 국민 10명 중 8명이 한국사회에 차별이 심각하다고 말하는데(「2020 차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보고서」, 국가인권위원회 2020) 차별이 없다거나 법 제정이 긴급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차별을 혼자 겪기 때문이다. ‘나를 차별한 사회’를 고발하려면 ‘나’부터 설명해야 하는 사회에서 차별당했다고 말하기를 포기하게 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모두가 등장하지도 못하는 사회에서 대통령 선거는 누구를 위한 잔치인가. 차별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담은 법 하나 만들지 못하는 기이한 상황을 직시할 때가 됐다.
국민의힘이 내세운 대선후보는 ‘공정’과 ‘상식’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한다. 공정의 한 조건으로 세계 여러 나라들이 마련한 게 차별금지법이고,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상식인데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업의 자유가 제한될 우려를 표했는데, 그러면 기업에 차별할 자유를 주자는 말인가. 대머리거나 뚱뚱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뽑지 않고, 나이가 어리거나 많다는 이유로 임금을 덜 주고, 여자라서, 아이를 낳아서, 아이를 키워서 같은 이유들로 퇴직을 강요하는 걸 기업의 자유로 보장하자는 말인가.
국민의힘과 다투기에 여념이 없는 더불어민주당은 이런 주장을 반박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 제정 대신 사회적 합의의 필요성만 말해왔다. 더불어민주당이 내세운 후보는 ‘어떤 영역에서도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면서 같은 입으로 ‘특정 영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14년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못하는 상황을 차별금지법 반대 단체들은 이렇게 말한다. “‘성적 지향 및 성별정체성’이라는 빌런이 법안명만 바꿔가며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도전을 11번이나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왜 제정되지 못했는가? 대부분의 국민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이 성소수자의 시민권을 부정하는 데 합의해준 것임을 알 때도 됐다. 국민 10명 중 7명이 이대로 가면 사회적 갈등이 더 심해질 거라며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데(같은 보고서), ‘차별금지법을 두고 갈등이 있다’는 말은 누구를 보면서 하는 말인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할 권리가 있다는 원칙도 세우지 못하는 정당이 진보를 자처하는 걸 믿어주리라는 착각은 이제 접어야 한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합의를 마친 사회를 두고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정치를 끝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대통령 선거의 쟁점이 아니라 전제다. ‘나중에’를 끝내자. 차별금지법이 먼저다.
미류 /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2021.11.17.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