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다시 어둠을 밝히는 마음으로
한라산에 이어 서울에도 때 이른 첫눈이 내렸다. 아직은 단풍철이어야 할 시간을 서둘러 마감하고 겨울이 성큼 다가온 느낌이다. 달라지는 절기의 감각 앞에서 누군가는 기후위기의 심화와 그 대처를 근심하고, 다른 누군가는 ‘위드코로나’가 잘 자리 잡아 방역과 생계를 위해 여전히 분투 중인 시민들에게 이 겨울이 너무 혹독하지 않기를 기도할 것이다. 이렇듯 얼마 남지 않은 한해에 대한 상념이야 사람마다 다양할 테지만,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부쩍 추워지고 어두워진 저녁 거리를 바라보다보면 어쩔 수 없이 5년 전 이맘때를 돌이켜보게 된다. 주말마다 열리는 대규모 집회 사이사이 이런저런 행사를 챙기며 그해 겨울 온통 거리에서 살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4대강사업이 진행되고 세월호참사까지 겪은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무엇보다 참담했던 것은 ‘이것이 나라냐’라고 할 만큼 엉망이 되어가고 있는 체제와 함께 이 시간을 사는 우리도 조금씩 망가지고 있고, 거기서 나 자신도 벗어나기 어렵다는 두려움이었다.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주민이 목숨을 끊고, 쌍용차 해고 이후 죽음이 계속 이어져도 분향소를 엎으려는 드잡이뿐 마땅한 예의조차 없던 시간이었다. 단식 중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투쟁’이라는 것이 자행되고 끝없는 막말이 이어지던 그 무렵은 혹시 정권이 바뀌기 전에 세상이 먼저 망가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떳떳하지 못하고, 답답하고, 부끄러웠다.
촛불은 그런 막막함을 일순간에 바꿔놓은 흐름이었다. 정권 퇴진의 요구로 시작되었으나 그 이상으로 새로운 세상을 외치는 발랄함이 있었고, 어제 집회에서의 갈등이 격론 끝에 내일의 집회에서 지켜야 할 새로운 수칙으로 등장하는 유연함이 있었다. 한해 전 겨울, 시위 현장에서 농민을 조준하여 물대포를 쏠 정도로 기세등등하던 경찰의 태도도 그러한 대세와 함께 바뀌었다. 반드시 비폭력을 고집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논란도 있었으나 우리가 이 정도 나섰으면 박근혜 퇴진 정도는 당연한 일이고,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자신감과 기대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심지를 환하게 밝힌 촛불부터 LED 촛불까지, 어둠 속에서 함께 불을 붙이고 밝음을 나누며 확인하는 행위에는 그만큼 특별함이 있었다.
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떠한가. 시대의 흐름을 바꾼 기여를 인정한다고 해도 촛불의 이름을 쉽게 불러내기는 조심스럽다. 촛불과 함께 등장했던 새로운 흐름의 많은 부분에서 그사이 생겨난 거리감이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다. 촛불 이후 한국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온 문제와 갈등은 촛불이 만든 문제라기보다 촛불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문제제기 당사자들에게는 실망을 넘어 때로 절망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 “나중에”라고 외치는 청중들 사이로 급히 퇴장한 일을 두고 해명을 내놓았지만, 노무현정부 때 처음 발의된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제정되지 않고 있을뿐더러 최근에는 법 제정을 요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의 국회 심사기한을 2024년으로 연기하면서 제정 의지 자체를 의심하게 했다.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 역시 위기의 긴박함에 비추어 더디거나 여전히 성장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모를 보일 때가 많고, 끊이지 않는 산재사고를 지켜보노라면 과연 이 정부가 누구 편인가라는 근본적인 차원에서조차 회의가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촛불 이후의 변화가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에 실망하여 ‘이러려고 촛불을 들었던가’ 쉽게 회의하는 마음을 돌아볼 필요도 있다. 합법적 절차에 따라 이뤄낸 대통령 탄핵이 아무리 대단한 일이었다 한들 그것은 시작일 뿐, 우리 자신이 그 일부이기도 한 낡은 세상을 바꾸는 일은 더 오래고도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년 전 그 겨울에도 그저 다음 선거에서 정권을 심판하면 된다며 기다렸거나, 눈에 보이는 정치적 해법만을 셈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한 사회의 감각을 바꾸는 사건으로서의 촛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간절함으로 불을 밝히는 마음, 다음이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다 해도 일단 나부터 움직여 큰 변화의 일부가 되고자 함께했던 그 밤거리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을 마치며 다시 촛불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촛불 5년을 지나며, 그리고 한반도와 한국에 중요한 변화가 출현할 수 있는 새해를 맞이하며 빼놓을 수 없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촛불 5년 동안 우리 주변에 즐거웠던 일, 슬펐던 일, 화를 나게 했던 일들이 모두 있었다. 이는 우리 삶 속에서도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촛불 속에서 우리가 한발 내디딘 지점은 무엇이었는가를 묻고 그 방향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역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백영경 /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2021.11.2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