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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태일이가,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김민정

권력자의 시각에서 기록되는 역사는 평범한 이들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를 덮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의 역사 속에서도 기억되는 ‘평범한’ 이들이 있고, 이는 계속해서 재생산되며 의미를 더한다. 최근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홍준표 연출)도 그중 하나다. 「태일이」는 이미 많이 알려진 고(故) 전태일 열사의 얘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익숙함’ 속에서 우리는 역사적 진실의 전형을 발견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1948년 해방 정국에 태어나 1970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태일이’의 일생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낼뿐더러 그 시대를 이어받은 21세기까지 연결된다. 영화는 ‘태일이’를 통해 수많은 평범한 이들을 호명하며 전태일의 사회적 의미를 다시 전한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인민들은 새로운 사회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은 미국, 소련 등의 지정학적 경쟁이 만들어낸 분단과 전쟁으로 좌절되었다.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태일이 가족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를 부친으로 둔 태일이 어머니는 정신대로 끌려가 대구 방직공장에서 강제 노동을 했고, 아버지는 해방 직후 활발히 전개된 노동자들의 공장자주관리운동에 참여했다가 미군정의 탄압으로 고초를 겪었다. 정권이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국가와 사업가는 저렴한 임금을 토대로 부를 축적하는 반면 인민은 일상적으로 빈곤을 체감하던 1960년대의 사회상황에서 어린 태일이는 부모의 벌이로는 가족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는 현실에 직면하고 생계 책임자로 호출당했다. 태일이는 가정환경을 부정하고 저항도 했지만 맏아들로서 책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꿈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체제의 중압감에 눌려 고통받는 영화 속 태일이의 모습에서 21세기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의 삶이 겹쳐진다. 청년 실업난이 심각해지면서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를 넘어서 내 집 마련, 인간관계마저 포기한 ‘5포세대’, 여기에 꿈, 희망까지 포기한 ‘7포세대’ 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청소년 태일이는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하면서 사회의 분단선을 감지한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의 것을 포기하면서 어린 ‘시다’(미싱사 보조)들의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태일이의 이타심은 평화시장의 고용 구조를 파악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개인의 도움으로는 시다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은 그는, 재단사가 업주와 협의해 시다의 노동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미싱사보다 적은 월급을 받는 재단보조사로 다시 취직했다. 그러나 근면하고 성실한 ‘근로자’ 태일에게 호의적이었던 사장은 폐병에 걸린 여공의 치료비를 요구하는 ‘재단보조사’ 태일에게는 냉혹하게 대했다. 사장은 ‘자신의 이익을 해치려는’ 재단사 태일이를 해고한다.

 

태일이는 사업주와 노동자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 것에 부당함을 느끼며 분노하던 중에 한줄기 희망을 발견한다. 노동운동을 경험했던 아버지를 통해 열악한 노동조건은 ‘근로기준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법이 ‘1일 8시간 노동’ 등 노동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청년 태일이는 이를 주변 재단사들에게 알리고, 그들과 함께 ‘바보회’를 조직해 근로기준법을 공부했으며,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조사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그러나 ‘바보회’의 희망은 정치환경의 혼란에 의해 짓밟혔다. 부정축재로 호의호식하던 정권과 기업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노동자와 도시 하층민이 적극 참여한 4·19혁명은 쿠데타를 통한 권위적인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일단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로기준법을 감독해야 할 노동청의 무신경한 반응까지 경험한 청년 태일이는 마지막 희망마저 좌절된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더러운 작업장에 뒤덮인 먼지를 마시며 하루도 쉬지 못하고 매일 14시간씩 일하는 어린 시다와 미싱사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려면 지금까지 했던 방법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직면하게 된다.

 

1960년대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에서 살기 힘든 이들이 도시 공장으로 몰려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농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노동자 의식이 형성된 집단이 등장한다. 태일이가 노동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환경과 맞물려 있다. 그를 지지한 돈독한 친구이자 동지 노동자들의 연대가 없었다면 청년 태일이는 평화시장에서 영영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온 태일이는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바꾸기 위해 능동적 의식을 가지고 도약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따라 ‘삼동친목회’를 조직한다. 삼동친목회는 박정희정권하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열악한 작업환경에 내몰린 이름 없는 노동자가 다수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고, 정부와 기업에는 노동환경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이러한 목소리를 무시했고,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서 노동자의 요구 분출을 막으려 했다. 결국 청년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채로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노동환경 개선 요구를 외쳤다.

 

마지막까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목소리는 영화가 끝나고도 남아 있는 듯하다. 영화 「태일이」는 제작에 필요한 재정을 상당부분 노동조합과 사회운동단체, 개인 후원금 등으로 충당해, 7분 동안 9천명이 넘는 후원자들의 이름으로 엔딩크레딧을 채운다. 전태일의 외침이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사회운동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주된 기제로 작동한 21세기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은 각자도생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인류애보다는 정신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경험하곤 하는데, 전태일의 모습과 이러한 반향들을 통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전태일이 어머니에게 배고프다고 말하는 후반부 장면에서 영화를 함께 관람하던 청소년들의 낄낄거림이 들렸다. 그 웃음이 거슬리지 않은 건, 적어도 이전처럼 배고픔에 눈물 흘리지 않게 된 지금의 시대는 전태일 같은 노동자가 쟁취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경제 불평등과 더불어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와 팬데믹을 경험하고 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구호는 이제 “체제를 전복하라!”는 메시지로 이어진다. 평범한 이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체제 전환이 필요하다는 세계 청년들의 목소리가 날로 커지고 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우리가 기후위기 해결의 주체다!”로 전이된다. 이는 기득권에 변화를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주체로서 스스로 인간다움을 쟁취하겠다는 의미이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요구는 “풍요롭고 평등한 지속가능 사회를 만들자!”라는 공세적인 대안을 만드는 저항으로 연결된다. 역사의 숙제는 이전의 비극이 또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선상에 놓여 있다. 영화 「태일이」는 지금, 미래를 개척할 실천에 나서려는 이들에게 그 이름만큼이나 큰 힘으로 다가갈 것이다.

 

 

김민정 / 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소장

2021.12.01.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