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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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촛불시민과 진보

강경석

안에서는 몰라도 밖에서 보는 한국은 이미 선진국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설립된 1964년 이래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가 변경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물론 국제사회의 그러한 인준절차가 지닌 상징적 의미와는 별도로 한국이 내용과 실질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지는 더 오래라고 할 수 있다. 소위 일인당 국민소득이나 무역, 군사력, 대중문화 등 여러 방면의 지표와 통계수치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밖에서 하는 평가와 안에서 이뤄지는 자기인식 사이에는 어느정도 시차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흔히 몸집은 커졌지만 그에 걸맞은 내적 성숙이 따르지 못했다는 식의 진부한 설명이 동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특히 20대 대선을 코앞에 두고 더욱 도드라지는 우리 사회의 여러 혼란과 기성정치 세력들 간의 후진적 행태들을 감안하면 그러한 ‘사춘기’ 비유가 여전히 현실 설명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고도성장기의 절정이자 그 종착역쯤에서 시작되어 30년 가까이 지속된 이른바 87년체제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촛불혁명 이후의 한국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그것은 한참 미달일 수밖에 없다. 외적 성장과 내적 성숙의 대별이라는 구도 자체가 어차피 선진국 또는 선도국가와 구분되는 ‘추격국가’의 패러다임에 속한 것이거니와 어떤 의미에서 촛불혁명은 추격국가 모델의 종식을 선언하고 그다음을 묻는 하나의 집합적 창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촛불혁명이 단순히 탄핵집회나 정권교체를 의미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사회적 에너지로 복류(伏流)하는 중임을 역설하게 되는 이유다.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너무나 많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현실정치와 관련해서도 전에 없던 현상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가령 임기 말의 대통령 지지율이 40퍼센트대를 오가는 가운데 거대 양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어 지지율 1~2위를 다투는 후보들이 모두 국회경험이 없는 비주류 출신이거나 외부 영입인사다. 여당 후보의 경우는 하나의 전형이다. 그의 입지전적 생애는 한국사회의 고도성장기를 거의 그대로 빼닮아 있는데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는 과거처럼 일종의 감정이입 또는 일체감을 통해 형성되었다기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의 경제회복 등에 대한 기대, 즉 이익투표적 성격에 더 가까운 듯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입지전이 심리적 거부감의 원인 중 하나로 작동하는 듯 보일 때조차 없지 않다. 제1야당 후보는 더 특이하다. 그는 알다시피 현 정부 들어 적폐청산의 선봉장으로 벼락출세한 검찰총장 출신이다. 그런 그가 촛불혁명으로 철퇴를 맞고 거의 빈사상태까지 이르렀던 제1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는 역설이 일어난 것이다.

 

분명 지난해 4·7재보궐선거 직후만 하더라도 제1야당은 ‘조국사태’와 정부의 부동산정책 실패 위에서 형성된 정권교체 여론에 힘입어 ‘탄핵의 강’을 건넌 듯했다. 언제 촛불혁명 같은 것이 있었느냐는 듯한 태도는 진영을 가리지 않고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면적 인식에 불과했음은 제1야당 후보와 그 선거대책위원회가 최근 보이고 있는 난맥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제1야당뿐 아니라 보수언론 등을 포함한 수구기득권세력 내부의 분열은 구조화된 측면이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또는 민주와 반민주 같은 낡은 구도로는 포착이 어렵다. 촛불 이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기득권 엘리트 지배세력에 대한 신뢰기반은 현저히 약화되었는데 상대적으로 더 근본적 타격을 입은 쪽은 재생산 위기에 처한 수구보수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선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평가될 뿐 아니라 기성세대에 비해 훨씬 이익투표적 경향을 띄는 20~30대의 이른바 MZ세대는 ‘후진국’에서 나고 자란 보수나 진보가 아니라 이미 선진국이 된 한국에서 나고 자란 세대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볼 점은 ‘선진국’에서 살기를 원하고 이미 ‘선진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MZ세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성향이든 진보성향이든 대다수는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나머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MZ세대만 잡으면 이긴다는 안이한 생각이 오늘날 제1야당을 난맥에 빠뜨린 결정적 원인이다. 이제는 웬만해서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없으니 사회의 혼란이 깊어졌다고 말할 사람도 있고 이익투표 성향이 강해지고 있으니 모두가 개인주의, 아니 더 나아가 이기주의자가 되어간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각성하고 요구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현실에 더 부합할 테다. 따라서 사회적 전환의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가 관건이다. 기존의 패러다임 안에서 사회적으로 이미 형성된 경로나 관성이 존재할 때는 누가 운전대를 잡든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길이 정해져 있는 데다 앞차가 잘 가고 있다면 따라가는 게 제일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의 선진국 또는 선도국, 그러니까 방향을 꺾어서 모르는 길을 앞장서 가야 한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승객들은 중지를 모아 방향을 결정해주어야 하고 운전사는 해당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제시할 뿐 아니라 충분한 운전능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이 기왕 나왔으니 말이지만 진보는 좌우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2.1.5.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