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멸치와 콩, 그리고 고(故) 배은심 어머니
어렸을 적 가장 싫어하던 반찬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멸치볶음과 콩자반을 꼽을 수 있다. 어머니는 편식을 봐주지 않았다. 반찬 타령을 하면서 끼니를 거르거나 도시락을 남겨 갈 경우에는 호통이 뒤따랐다. 평범한 가정에서 멸치와 콩은 가장 저렴하고 달리 대체할 길 없는 칼슘과 단백질의 공급원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셨을 터이다.
그후 부모님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내가 대학생활을 시작한 1986년의 대학가는 데모와 최루탄, 학교 교정에까지 진을 친 무장경찰, 선배들의 잇단 죽음으로 뒤숭숭한 곳이었고, 생전 처음 집을 떠나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던 나는 혼란 속에서 퍽 위축되어 있었다. 그해 늦은 봄 학교로 찾아와 시끌벅적한 기숙사 식당 한 귀퉁이에 앉아 계신 어머니를 만났다. 거기에는 편식하는 아들을 혼내시던 ‘쎈’ 엄마가 아니라 환갑을 앞둔 작은 체구의 반백의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왈칵 울음이 나왔다.
이후 나는 서투른 자취생활을 시작했고, 87년 이후 뒤늦게 시작한 학생운동에 몰두하다가 영양실조와 장염을 얻고 말았다. 며칠간 병원 신세를 지고 나온 나는 대학 근처 식당에서 순두부백반을 주문하곤 찌개는 물론이고 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과 콩자반, 미역줄기볶음 따위를 남김없이 먹어치웠다. 깨끗하게 비워진 반찬 접시를 보면서 나를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했다고 스스로 만족하고 안도했다. 그후부터였을까? 멸치와 콩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2007년 11월에 돌아가셨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낡은 가계부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당신의 일기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 중엔 나에 관한 것도 있었다. “태호가 못 온다고 전화함” “태호가 왔다가 바로 올라감” “태호에게 전화함” “태호에게 다녀옴” 일기에 적힌 내용들은 집 떠난 아들의 무심함의 증거들이었다. 민망하고 미안하여 울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과에 87학번으로 입학했던 재벌가의 아들 정모씨가 최근 난데없이 SNS에서 ‘멸공’을 언급한 데 이어, 야당 대선후보와 정치인들이 멸치와 콩을 구매하는 장면을 포스팅하여 때아닌 멸공 캠페인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공산당을 멸하자’라는 섬뜩한 구호를 들고나와 키득거리는 것이 몹시 불편하다. ‘공산당은 죽여도 좋다’라는 구호가 당연한 듯 외쳐지던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억울한 죽음과 고통이 이어졌는지를 기억하기에 이 냉소와 혐오가 더욱 역겹다. 공산당이 실질적 위협이라고 여겨서 이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라면 그 시대착오가 절망스럽고, 만약 실체적 위협이라기보다 이들 권력층들이 혐오하고 찌질하다 여기는 모든 것의 상징으로 ‘공산당’이 호명되는 것이라면 더더욱 절망스럽다. 이 철 지난 캠페인은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한다는 이들이 지닌 품격이 얼마나 허접한가, 이들이 그리는 소위 일류기업의 미래, 이들이 꿈꾸는 권력의 미래가 얼마나 비인간적인가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때아닌 ‘멸공’ 짓거리의 와중에 고(故) 이한열의 어머니 고(故) 배은심 어머니가 지난 1월 9일 돌아가셨다. 고인은 어버이날 ‘바빠서 못 내려간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1987년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진 아들과 만나야 했고, 이어 속절없이 아들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평범한 학부모였던 그이는 고인이 된 아들의 영정을 들고 부지불식간에 대열의 맨 앞에 서게 되었고, 그렇게 6월항쟁의 한복판에 나선 이후 35년간 이한열의 어머니이자 모든 억울하고 힘없는 이들의 어머니로서 바람막이가 되어 살아왔다. 그이는 지난 35년간 ‘민주화운동’의 모든 곳에 함께 있어왔다. 마치 멸치볶음과 콩자반처럼, 배은심 어머니를 비롯한 유가족들이 늘 거기에 있었기에 거기 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이들이 그 자리를 지켜왔기에 그리고 그 대열의 앞에 서 있었기에 ‘멸공’의 칼바람 앞에서도 기댈 공간, 숨 쉴 공간이 생겼다. 분단체제가 만든 온갖 반인권적 제도와 야만적인 국가폭력도 온몸을 던져 내딛는 어머니 아버지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진 못했다. 두려움 없이 모든 것을 걸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때 민주화운동을 같이했던 동료들이 이제는 제법 민주화가 되었다며 일상으로 혹은 권력의 자리로 떠나간 이후에도 그이들은 가장 그늘지고 주목받지 않는 곳에 함께했다.
고(故) 배은심 어머니를 비롯한 민주화운동 유가족 어머니 아버지들이 살아냈던 삶은 힘없고 고통받는 이들이 지닌 품위, 이 나라 지배세력은 결코 가지지 못했고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는 품격과 힘을 보여준다. 이 땅에서 그이들이 헤쳐온 길을 지금은 세월호 아이들의 어머니 아버지들,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 이한빛의 아버지 이용관 등이 온몸으로 이어가며 이 나라 정치와 체제가 결코 제공하지 못한 연대, 살림, 존엄의 희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고인이 된 그이가 지난 2017년 광주 5·18 구 묘역에서 세월호참사 유가족들과 나눈 이야기를 되새김하는 것으로 그이에 대한 추모를 대신하려 한다.
“여러분들은 지금 3년인데요, 저는 30년이 되었습니다. 30년을 살다보니까 참, 살아나온 것도 허무하고, ‘이렇게 왜 살고 있지?’ 내가 나한테 물어보고도 싶고… 괴롭습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들은, 예를 들자면 죽어 있는 이한열이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짊어지고 살아갈 에미가 불쌍하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모른다고 합디다. 아무것도 모른대요. 와서 불러도 몰라요, 말도 없어요.
미우나 고우나, 좋으나 후지나, 노랑 옷 가족이 돼버렸네요. 그래서 가족들의 힘으로 이 나라가 조금 밝아질 수 있도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끌어나가는 경험, 그게 경험입디다, 경험도 참 지랄 같은 경험 쌓고 살고 있으니까… 힘내시고, 우리 애기들의 그 모습 잊지 마시고. 그 모습 안 잊으려구요 대중들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거 간직할라고 30년 동안 대중 속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자식들 간직하고, 잊으면 안 되니까, 그 힘으로 너무 마음 아프지만은 간직하면서, 그 얼굴 그려가면서, 그렇게 사십시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태호 /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2022.1.12.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