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
5년 전 촛불항쟁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진실을 다시 확인한 데 있다. 당시 광장의 시민들은 말과 현실의 일치가 주는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찰나의 감흥에 그칠 수도 있었던 사건은 탄핵과 새 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그 순간에 드러났던 진실을 현실에 구현하기 위한 노정, 즉 촛불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는 이미 이룩한 것보다는 앞으로 이룩할 일에 방점이 찍힌 현재진행형의 혁명이며,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나라의 주인들이 이끌어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말의 ‘향연’에서 촛불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다. 촛불을 들었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어디 먼 곳으로 가거나 사라진 것은 아니다. 광장을 떠난 이후 다시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 나라의 일을 결정하는 데 매 순간 참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촛불항쟁을 거친 시민들이 이전과 다른 주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촛불혁명의 지속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주체의 등장을 전제하지 않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우선, 제1야당의 대통령후보가 자신이 속한 정당과 관련해 어떤 경력도 없을 뿐 아니라 그 정당의 전신(前身)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파란만장한 한국 정당사에서도 초유의 일이다. 이는 지속 중인 촛불혁명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자신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 어떤 수단도 다 동원할 수 있다는 결의의 표출이기도 하다. 촛불혁명이 그만큼 기득권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뜻으로, 기득권 세력이야말로 촛불혁명이 가져온 변화를 누구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현 정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정부와 비교해 지금 한국정부가 특별히 부정적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다. 한반도 군사 긴장과 북미 대립, 코로나19 팬데믹 등의 위기를 안정적으로 관리했을뿐더러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도 여러모로 높아졌다. 그럼에도 정치적 반대자들만 아니라 촛불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내에서도 비판적 시선이 적지 않다. 스스로 ‘촛불정부’라고 자임하고 나선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고 그에 비추어 부족한 점이나 비판받을 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촛불혁명의 성과를 다 부정하거나 현재 진행되는 선거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일부의 태도는 큰 문제이다.
나라의 주인이라면 촛불의 한계까지도 자신이 감당할 몫으로 생각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다. 현재 공론장에서 촛불이 보이지 않지만, 촛불을 들었던 나라의 주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여전히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하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높은 임기말 지지율도 대통령 한 사람에 대한 호감도 때문만은 아니다. 촛불혁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든 안 하든, 현 정부에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생각할지라도 촛불항쟁을 거치며 시작된 이 변화가 멈춰서는 안 된다는 의지의 간접적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의지는 촛불항쟁 때까지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의제들, 특히 성평등, 기후위기 대응, 불평등 극복 등을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핵심 의제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대선 국면에서 이러한 의지가 표출될 수 있는 활발한 통로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정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언론의 대대적 공세도 공론장의 작동을 위축시키고 있다. 여당 후보도 촛불정신에 비추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현재의 선택이 우리나라가 앞으로 가야 할 길과 무관하다는 식의 시선, ‘모두까기’에 안주하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주인의 자세가 아니라 구미에 맞는 상품을 선택하는 “소비자”에 가깝다(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16면). 이런 행태로는 현실을 변화시키는 동력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나라의 주인이라면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일도 해야 한다. 기득권 구조의 개혁과 한반도 평화 정착이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거란 제한된 선택이 불가피한 것이지만 어떠한 선택이 이러한 길로 나아가는 데 더 나은가를 판단하는 일만큼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약간의 상식만 동원해도 그 판단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우리의 선택을 받은 이가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주관적 의지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사회 역량이 대전환에 값하는 변화를 만들어낼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선택이 나라의 주인이 온전하게 제 역할을 하는 쪽에 가까워질수록 기대와 현실의 차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촛불항쟁을 거친 우리는 그 길에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와 있다. ‘백척간두 진일보’의 태도로 이 대전환 시기를 헤쳐가야 할 때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2022.2.2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