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빼앗긴 들판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내설악에 자리 잡은 강원도 인제 땅, 예로부터 깊은 산과 빠른 강, 눈과 얼음의 고장이다. 여기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언 강을 건너봤다. 물은 어릴 적부터 익숙하지만, 강물 위를 걷는 건 상상도 못해봤다. 꽁꽁 얼었대도 아래로는 물이 흐르는 강 위에서 첫발을 뗄 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 강에서 아이들은 썰매도 타고, 스케이트도 배우고, 얼음축구도 했다. 건너도 되는지 어떻게 알아? 꽝꽝 발을 굴러보면 알지. 얼음에 대한 감각을 어른보다 빨리 익힌 우리 집 소년이 말했다. 저것 봐.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눈 쌓인 강 위로 지나간 커다란 동물 발자국도 안전 표시다. 지금은 그 강이 없다. 물도 없고 얼음도 없는 겨울 강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마른 강바닥 보니 맘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엊그제 마을도서관 책 정리를 같이 하고 강을 지나 돌아오는 길에 여기서 태어나 평생 살아온 이웃이 그런 말을 했다. 슬픈 시와 같은 말. 나는 갈라진 강바닥에서 찢어진 마음을 읽는 일이 아직은 낯설다.
서울 살다 귀촌한 지는 7년, 처음에는 블루베리 과수 농사를 했는데 작년에 접었다. 50일이 넘는 긴 장마 끝에 알 수 없는 병충해가 골짜기를 덮은 해였다. 산촌이지만 냇강이 어디나 흐르는 곳이라 봄이 오는 소식을 소리로 알았다. 여기는 봄이 오려면 강이 먼저 와글와글 시끄러워진다. 얼음이 녹아 부딪치며 흐르기 때문이다. 그 소리가 이제 봄이다, 어서 준비해라, 하는 신호다. 그런데 강물의 신호가 끊긴 지 몇해 되었다. 점점 강이 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얼음을 깨고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해질 때인데, 물이 흘러야 할 강에 돌이 구르고 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동네 주민들이 이곳은 산이 깊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다른 데선 가물어도 여기는 옛날부터 물 걱정은 없이 산다고 한입으로 자랑하던 곳인데.
겨울 가뭄이 길어지면 사람들의 눈 속에는 불이 일렁거린다. ‘물이 없으면 불이 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산이 우는 소리를 내는 눈사태의 징조처럼 산불도 징조가 있다. 여기선 마른 강이 불을 예고한다. 워낙에 바람이 세고 불의 먹잇감이 많은 고장이다보니 봄이면 노상 이곳저곳에서 불이 나지만, 산불감시원과 의용소방대가 ‘우리의 산과 들’을 지켜왔다. 문제는 불이 점점 더 자주, 더 크게 나고 진화가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엊그제도 작은 산불이 났는데, 소방헬기가 몇번이고 가까운 옆 강에서 물을 담으려다 결국 실패하는 걸 봤다. 강에 물이 없으니 불이 나면 소방헬기는 더 멀리 갔다 와야 한다. 면사무소 앞에는 ‘여성 의용소방대원 모집’ 플래카드가 걸렸다. 산불이 나 소방대가 출동하더라도 지역의 산세를 잘 알고 불 경험이 있는 의용소방대의 조력이 필수적이다. 구체적인 장소를 기반으로 체득되어온 특수하면서도 공통적인 지식을 고대 그리스말로 ‘메티스’(metis)라고 한다. 그러나 지구화 시대의 정보와 지식은 지역의 메티스를 몰아낸다. 산불감시원과 의용소방대원의 평균연령은 점점 높아지고, 산을 알고 불을 아는 이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간다. 농촌과 농민의 소멸은 땅과 밀착된 공통의 지식과 문화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곳의 겨울은 모진 추위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노인들은 겨울이 춥지 않으면 다음해 농사에 병충해가 심해진다며 걱정한다. 봄에는 개구리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개구리의 안녕을 묻는 일은 대지의 노모스(nomos)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다. 너무 가물어도, 갑자기 추워도 개구리가 없어진다. 개구리가 몰살이면 벌레가 창궐한다. 개구리는 숲과 마을의 경계에서 살면서 자연과 인간의 공동법칙을 일러준다. 재작년 우리 밭에 벌레가 창궐한 것도 이상하게 따뜻했던 겨울과 이상하게 추웠던 봄 다음이다. 농사 경력 수십년 된 베테랑 농사꾼도 겪어본 적 없는 벌레들이 끝도 없이 나왔다. 작년 봄에는 뽕나무가 당했다. 미국선녀벌레가 나무를 하얗게 뒤덮더니 검게 익어야 할 오디가 하얗게 말라버렸다. 가을에는 잣나무가 아팠다. 잣 딸 때가 다가오는데 홍천에 번졌다던 잣나무 재선충병이 결국 인제까지 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집 근처 잣나무들이 노랗게 말라갔다. 잣 수확량이 예년의 절반도 못된다고 했다. 송이를 따러 간 산꾼들도 더 오래 산을 헤매고도 바랑을 채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논농사, 밭농사에서 밑진 것을 산농사로 벌충해왔는데, 가을 산농사까지 쫄딱 망하고 만 것이다.
농사에서 구멍 난 것을 메우려면 다른 부업을 찾는 수밖에 없다. 우리 옆집 땅은 보기만 해도 농사의 귀감이다 할 만큼 잘 가꾼 밭이었는데, 재작년에는 엉망으로 망가지고 말았다. 밭주인은 초보 농부인 우리에게 농사일을 차근차근 잘 일러주시곤 하던 분인데, 알고 보니 인근 공사장에 일을 다니느라 밭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것이다. 농촌에서 논밭은 농민의 낯과 같은데 자신의 자부심이던 밭이 풀에 먹힌 것을 보는 심정은 어땠을까. 가족농 규모의 농가에서 비는 일손은 다른 가족구성원의 몫이 되기 마련이다. 마지막은 대개 여성 농민에게 흘러온다. 기후변화가 심해질수록 농사일의 노동 강도와 위험도는 연쇄적으로 높아지고 위기 대응력은 약화된다. 자기 삶을 제대로 돌볼 시간도 없는데 의용소방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서로 돌봄의 공동체는 그렇게 무너진다.
한창 봄 농사를 준비해야 할 시기지만 들판은 조용하다. 논물에 하늘이 호수처럼 비치고, 여름에는 푸른 물결이, 가을이면 황금 파도가 넘실대 인제에서도 보기 드문 옥답이라고 이름도 상서롭고 평화로운 땅 '서화’라 불리는 곳이지만, 이제는 검은 패널, 파란 비닐 차양이 넘실거린다. 검은 것은 태양광밭이고 파란 것은 인삼밭이다. 인삼밭은 조금씩 논을 잠식하더니 몇년 새 야금야금 옥답이란 옥답은 다 먹어치웠다. 사이사이에는 대규모 하우스시설 단지가 들어서 있다. 놀러 온 친구가 상상하지 못한 풍경에 놀라 왜 인삼을 이리 많이 키우느냐 묻는다. 주민들이 키우는 게 아니라 땅을 빌려준 것이다. 인삼밭은 임대 계약이 6년 단위인데다 업자들은 통상 임대료를 일시불로 지급한다. 지을수록 빚만 느는 고령화된 농촌에서 땅 빌리기는 누워서 떡 먹기다. 농촌형 젠트리피케이션이 임대료도 거의 두배로 올려놓아 기존의 임대농들은 농사를 포기하거나 더 힘든 처지에 내몰린다.
이것이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기후정의운동은 바로 이 최일선공동체로부터 저항과 돌봄의 경로를 동시적으로, 세심하게 짜가야 한다. 농촌과 농민은 자연과 인간의 서로 돌보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근본 터전이요 가장 중요한 주체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일제강점기에 나온 시지만 해방이 오고도 농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지금도 계속된다. 기후위기 시대에 농촌의 봄은 어떻게 오는가를 써달라고 하였다. 나는 이렇게 전한다. 우리의 들판은 자본에 빼앗겨 봄조차 빼앗겨버렸다고.
채효정 / 정치학자, 『오늘의교육』 편집위원장
2022.3.23.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