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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빵’의 미신, 21세기의 야만

서재정

“공격은 많은 경우에… 가장 확실한 방어 수단이다.”

1799년 6월, 조지 워싱턴은 존 트럼불에게 편지를 보내며 탄식했다. 이 ‘자명한 진리’를 미국인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이 프랑스 해군과 산발적으로 충돌하며 상대국의 상선을 포획하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 ‘유사전쟁’을 치르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탄식이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세력과 유럽 군주들의 동맹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중립을 선언했지만 영국의 압박 때문에 결국 프랑스와 전쟁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이었다. 그나마 워싱턴이 현직에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미국은 확전을 피했다. 1800년에는 모르뜨퐁뗀 조약을 체결해 사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3년 뒤에는 루이지애나 영토를 단돈 1천5백만 달러에 구입해 하루아침에 영토를 두배로 늘리기까지 했다. 워싱턴의 말과는 다르게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도 피할 수 있었고 엄청난 영토를 거의 공짜로 얻을 수도 있었다.

 

백년쯤 후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자명한 진리’를 믿어서 사달이 났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 독일제국군 원수가 처음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을 유럽의 많은 지도자들이 믿고 있었다. 독일제국군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도, 전쟁사학자이자 당시 최고의 인기작가로 “전쟁은 신성한 업무”라고 설파하던 프리드리히 폰 베른하르디도 이를 신봉했다. 조제프 조프르 프랑스군 원수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군대는 공격 이외의 다른 법칙을 알지 못한다. 그 이외의 다른 개념들은 전쟁의 본질에 위배되는 것으로 배척되어야 한다.” 영국도,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유럽의 모든 지도자, 군사전략가들은 공격의 우월성에 추호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을 촉발시킨 슐리펜계획은 이러한 확신 아래 작성됐다. 독일의 작전계획은 정교했지만 그 출발점은 프랑스에 선제공격을 가하고 이어서 러시아를 치면 승리한다는 미신이었다. 프랑스도 유사시에는 선제공격한다는 전략을 채택했고, 러시아도 빠르게 군대를 동원해서 선공을 펼치려 했다. 모든 주요 유럽 국가들이 이같은 미신에 휘둘리고 있었기 때문에 돌발적 상황이 발생하자 선제공격을 위한 군사 동원이 연쇄적으로 이뤄졌고, 이 싸움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세계대전으로 비화됐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중단시킬 수 없었다.

 

공격이 방어보다 유리하다는 미신은 1980년대 미국 국제정치학자들의 주요한 연구 주제가 됐다. 잭 스나이더, 스티븐 반 에베라같은 쟁쟁한 학자들이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연구한 논문에서 ‘선빵의 미신’을 지적했다. 당시 미국 학자들은 왜 이에 주목했을까?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하며 선제공격 독트린이 득세하기 시작한 것이 그 배경이다. 1970년대까지는 미국과 소련이 각자의 핵무기로 ‘공포의 균형’을 이루며 상호억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80년 들어 레이건 행정부는 ‘별들의 전쟁’(Star Wars)이라는 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핵 보복 가능성을 제거해 미국을 안전하게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렇지만 소련의 보복 가능성이 원천 봉쇄된다면 미국은 거리낌 없이 ‘선빵’을 날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소련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선제타격 능력을 확보하기 위한 군비경쟁과 위기의 상승이 초래된다. 스나이더와 반 에베라 등은 이 미신에 미국과 소련이 빠지게 되면 제1차 세계대전을 능가하는 비극이 초래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자 했던 것이다.

 

야만의 시대였던 20세기가 지나간 지도 20년이 넘었지만 ‘선빵의 미신’은 여전히 세상에 횡행하고 있다. 우선 미국 조지 W. 부시 정부가 21세기를 선제공격으로 열었다. 대량살상무기를 미리 제거한다며 이라크를 침공했고, 테러리스트를 제거한다며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유럽에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를 계속 확장하고 그 동쪽 끝에 미사일 방어체계와 미사일을 배치해 러시아를 선제적으로 타격할 능력을 추구해왔다. 바이든 정부 들어서도 미사일 방어체계와 극초음속 미사일 등 선제공격 능력을 향상시키는 무기체계를 계속 개발, 생산하고 있다. 핵무기 선제사용은 없다던 바이든 대통령의 안보 공약은 최근 핵무기 선제타격이 가능하다는 ‘전략적 모호성’으로 급전환했다. 게다가 연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범자’ ‘도살자’라고 비난한 끝에 “이 사람은 권좌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없다”며 정권교체를 시사하는 발언으로 파문을 키우고 있다.

 

중국의 시진핑 정부도 서두르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타이완과 통일이 어려워지고 영토완정의 꿈이 멀어진다고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 우려는 전략적 불균형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중국은 핵전력에서 미국에 한참 뒤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이 전략무기의 압도적 우위에 기대어 타이완 독립 세력에 힘을 실어주고 있으니, 자신들도 전략적 군사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중국은 핵전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군을 현대화하여 적어도 국지적 선제타격이 가능한 능력을 확보하며 지금까지의 ‘최소적 핵 억제’ 전략에서 이탈해 영토완정을 가능하게 할 전략적 환경 조성을 추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 정부는 ‘선빵’을 실행에 옮겼다. 물론 군사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크라이나를 폐허로 만들고 인도적 위기 상황을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코피 전략’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경고장을 받은 유럽은 오히려 ‘몸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유럽에서 ‘선빵의 미신’이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남과 북이 모두 20세기의 미신을 좇고 있다. ‘선제타격’을 공언했던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만이 아니다. 사실 문재인정부도 판문점 선언과 9·19남북군사합의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군비확대를 계속했고, ‘3축 체계’라는 이름만 바꾸었을 뿐 선제타격 능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다만 문재인정부가 ‘힘을 통한 안보’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동시에 추진하는 모순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것이라면, 차기 정부는 ‘힘을 통한 안보’만을 추구할 태세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 결렬에도 불구하고 핵무기·ICBM 시험을 실시하지 않았던 북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물의 하나를 며칠 전에 선보였을 뿐이고 앞으로 더 보여줄 것이다. 작년 10월에만 해도 “우리의 주적은 전쟁 그 자체”라며 군사력의 목적이 자위라고 했던 김정은 총비서도 ‘화성-17호’ 발사 이후 발언이 더 강경해졌다. “진정한 방위력은 곧 강력한 공격 능력”이라고. 슐리펜의 발언과 판박이다.

 

이제 우리는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와 비핵화를 이루자는 목표가 순진해 보이는 상황으로 돌진하고 있다.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의 눈에 핏발이 서고 있다. 모두가 선제타격을 추구하며 그럴 힘을 키우고 있다. 먼저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잦아지고, 그를 제어하는 제도와 도덕률이 힘을 잃고 있다. 그럴수록 ‘선빵의 미신’은 세계의 신앙이 되어간다.

 

‘야만의 시대’는 되풀이되는 것인가. 한번은 비극으로, 두번째는 더 큰 비극으로.

 

 

서재정 /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2022.3.30.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