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과학기술중심사회란 무엇인가?: 제55회 과학의 날에 즈음해
대학에서 십년 넘게 과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매년 강의 내용을 조금씩 바꾸는데, 학계의 새로운 연구동향을 반영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현재 벌어지는 사건들을 보면서 과학과 역사에 관한 생각의 폭과 관점 또한 변하기 때문이다. 올해는 갈수록 심해지는 기후위기, 미중 패권전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볼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서양·남성·영웅 중심의 과학사 서사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특히 16~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을 다루지 않고 근대과학의 형성을 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대로부터 천년 넘게 내려오던 우주관을 바꾸고 이것을 지탱해온 인식론적·존재론적 연구방법론을 대체하는 데 기여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베이컨, 데까르뜨, 뉴턴을 빼고 어떻게 과학의 역사를 구성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각기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영웅서사의 기본 틀을 만들어준다. 예컨대 뉴턴은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유명한 말로 지금까지도 미래세대에 영감을 주고 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새로운 혁명의 주체가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과학혁명 이후에 뉴턴이라는 거인 위에 올라선 이는 찾기 어렵다. 오히려 뉴턴의 법칙을 이용해서 조수간만의 원인을 설명하고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며 지구가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 적도 부분이 불룩하게 나온 모양이라는 뉴턴의 주장을 탐사를 통해 실제로 확인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졌다. 뉴턴의 어깨 위에 올라가기보다는 그에게 기대어 연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18세기는 과학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밋밋한 시기, 산업혁명이라는 폭풍이 도래하기 전 고요한 시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통해 과학의 내용보다는 속성(합리성, 객관성, 공공성)이 미국독립혁명, 프랑스혁명 등 정치적으로 중대한 사건에 영향을 준 시기로 여겨진다. 이렇듯 과학혁명, 산업혁명, 정치혁명의 자락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만큼 다루기 힘든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학기 수업을 준비하면서 18세기에 좀더 주목하게 되었다. 지난 3월에 치른 대통령선거 전후로 과학기술중심사회, 과학기술기반사회, 디지털플랫폼정부와 같은 구호가 명확한 정의 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를 18세기 초의 상황과 비교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상가 볼떼르는 과학을 사회개혁과 연결해 옹호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데까르뜨의 기계적 관점에 따라 천체의 움직임을 비롯해 열의 전달, 무지개 현상, 자석의 작동 등 여러 자연현상을 눈에 보이지 않는 크고 작은 입자들의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검증하기 어려운 메커니즘, 모델, 가설이 수없이 나왔다. 볼떼르에게는 이런 경향이 독선적인 프랑스 교회와 엄격한 신분제에 따른 귀족사회를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비하면 뉴턴으로 대표되는 영국의 과학은 너무도 달랐다. 경험적이고 합리적이며 가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더욱이 영국 사회에서 과학자의 위상은 프랑스와는 격이 달랐다. 1727년에 교회와 귀족의 탄압을 피해 잠시 영국에 머물렀던 볼떼르는 마침 런던에서 거행된 뉴턴의 장례식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매우 성대하게 치러졌을 뿐 아니라 왕, 여왕과 나란히 웨스트민스터 서원에 안치되었고 시와 그림을 통해 거의 신격화되는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스웨덴에서 객사한 뒤 이름 모를 묘지에 묻힌 데까르뜨와 너무나 비교되었다.
귀국 후 볼떼르는 『철학 서간』에서 자유로운 정치체제 속에서 피어난 영국의 문화와 사상을 소개하는 데 힘을 쏟았고, 『뉴턴 철학 원론』을 집필해서 뉴턴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때 대중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순회도서관, 살롱, 술집, 커피하우스 등에서 회합을 가졌던 숙련공, 기술자, 장인, 항해자, 건축가, 박물학자, 사업가들이었고, 자기 집에서 지적 사교모임을 주관했던 부유한 계층의 여성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볼떼르의 연인이던 샤뜰레 부인이 대표적인 예다. 수학에 뛰어났던 샤뜰레 부인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번역했고, 『숙녀들을 위한 뉴턴』을 쓰고 있던 이탈리아 과학자를 자신의 성에 초대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지적 분위기, 즉 신분과 직업, 나이와 성별, 지역과 국경을 뛰어넘어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익히려는 배경 속에서 18세기 중반 『백과전서』(1751~72) 프로젝트가 나올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볼떼르, 디드로, 달랑베르, 루쏘, 몽떼스끼외 등 계몽사조의 지식인들에게 『백과전서』는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위한 플랫폼이었다.
한국에도 볼떼르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자주적 공업화를 위해 과학운동을 주도한 김용관(1897~1967)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를 1회로 졸업한 김용관은 1924년에 발명학회를 설립해 과학 및 공학에 관한 도서와 잡지를 출판하고 발명특허 수속을 도와주며 공업품 제작·판매와 공장설계 등을 계획했다. 그는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침체에 빠진 학회를 재건하기 위해 조선변호사협회장을 지냈던 이인,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윤치호, 시인 주요한, 시조시인 이은상 등 저명인사들을 영입했다. 이어 한국 최초의 과학잡지인 『과학조선』을 창간해 ‘과학의 민중화’를 내세우며 사회개혁을 위한 문화운동을 이끌었다. 마침내 발명학회 회원들은 1934년 4월 19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현 YMCA회관)에서 8백여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제1회 ‘과학데이’ 행사를 거행했다.
이 행사 이후 발명학회와는 별도로 ‘과학지식보급회’가 결성되었다. 여운형, 김성수, 김활란 등 사회명사 100여명이 참여해 전국 조직으로 시작된 과학지식보급회는 발기문에서 “전조선사회의 과학적 재편”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생활의 과학화! 과학의 생활화! 이천만 조선민중은 생활을 요구한다. 생활을 요구하기 때문에 과학을 요구한다. (…) 과학은 자연법칙의 현시자요, 현대생활의 지휘자요, 공업의 안내자요, 수확의 증가자요, 질병의 정복자요, 미신의 타파자다.” 이듬해 전국적으로 성대하게 치러진 제2회 과학데이에는 서울 시내 카퍼레이드와 함께 홍난파 작곡, 김억 작사의 「과학의 노래」 합창이 있었다. 가사는 다분히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새 못 되야 저 하늘 날지 못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과학운동은 민족자강운동이었고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1937년부터는 과학데이의 옥외행사가 금지되었다. 그다음 해에는 김용관이 체포되었고 과학지식보급회는 해체되었으며 발명학회는 곧 친일 관변단체로 변하고 말았다.
우리는 매년 4월 21일을 ‘과학의 날’로 기념한다. 왜 이날인가? 1967년 과학기술처가 설립된 날이기 때문이다. 관료주의의 산물이다. 2003년 노무현정부 출범 이후 과학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과학의 날을 과학데이가 열렸던 4월 19일로 바꾸자는 의견이 활발히 제기되었다. 발명학회 회원들이 찰스 다윈의 서거일을 기념하여, 다시 말해 민족의 운명을 진화론에 투영해 바꾸어볼 요량으로 과학데이를 선정했던 정신을 이어받자는 주장이었다. 결국 과학의 날은 바뀌지 않았지만, ‘과학기술중심사회’라는 정책 기조 아래 과학기술부장관이 부총리로 승격되는 등 정부조직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후 이명박 정권에서 과학기술부총리제는 사라졌고, 과학기술부 조직도 교육부 또는 정보통신부와 합쳐지거나 쪼개지면서 독립성이 모호해졌다. 과학기술처 출범일을 공식적으로 기념할 명분이 더욱 약화된 것이다.
과학기술중심사회란 무엇인가? 볼떼르와 김용관의 예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구체적인 상이나 실현방법은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단순히 정부조직 변화와 연구예산의 증가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과학기술자뿐 아니라 사상가, 문인, 정치가, 사업가 모두 힘을 합쳐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변혁을 꿈꿀 때 그 모습이 조금 보이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과학조선. (ⓒ한국학중앙연구원)
박범순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2022.4.20.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