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5‧18에 관해 쓰기
대구에서 살던 때 집 안방에는 내 손이 간신히 닿는 정도 높이에 책장이 있었다. 거기에는 김남주 김지하의 시집과 실천문학에서 나온 여러 시집들이 꽂혀 있었다. 모닥불을 찍은 사진을 넣은 액자가 시집 앞에 놓여 있었고 지금도 이름을 댈 수 있는 여러 책들이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꽂혀 있었다. 5‧18에 대해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그 책장에서 노란 표지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사진집(전남사회운동협의회 엮음)을 보게 되면서이다. 열살이었고 그해 광주에서 대구로 이사를 간 터라 새로운 곳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로운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적응에 힘들어하고 있다기보다 그냥 광주를 무척 그리워했다. 매일 충장로 금남로 여러 골목을 까먹지 않으려고 반복해서 떠올려보고 또 걸어가보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사진집을 왜 광주 집에서는 보지 못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광주 집에서는 어딘가 책더미 속에 함께 쌓여 있다가 대구로 이사 가서야 책장에 꽂히게 된 것 같다. 고향이 광주이니 5‧18에 관해 여기저기서 들었을 테지만 제대로 알게 된 것은 그 사진집을 보면서였다. 사진집을 반복해서 보고 김남주를 읽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나는 시집들을 건너 다녔다. 시 속에는 무등산이 반복되었고 이전에 무등산에 갔을 때 정말로 어렸을 때였는데 등산로 입구에서 두꺼비가 나와서 울었다. 내가 아는 그곳과 시 속의 무등산은 연결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다. 중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광주를 계속 그리워했고 사진집을 반복해서 보았고 중학교에 간다고 뭐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시간은 흐르고 그러는 사이 내가 알던 충장로와 금남로가 여러 의미로 합해져서 더욱 선명한 기억이 되어갔다.
처음 5‧18에 관해 소설로 쓴 것은 단편 「그럼 무얼 부르지」이다. 대학 때 만난 다른 지역 친구가 5‧18은 386들이 술 마시면 하는 이야기 같아서 지겹다고 말했던 것과 그즈음 표면화된 5‧18 왜곡이 참기 힘들었다. 정말로 어딘가에 균열을 내고 싶었다. 내가 그걸 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게 내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고 쓰면 균열은 만들어진다. 나는 그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잘은 모르겠지만 쓰는 동안 가능해지는 때가 혹은 그렇게 착각하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다보면 소설을 쓰는 동안 ‘네가 실제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차갑게 써야 해 마치 관심이 없는 것처럼 써야 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건조하게 써야 해’라고 다짐했던 것이 이어서 떠오른다. 왜 그랬을까. 나는 멀리 가보아야 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도 이유는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짐작해보면 나는 매번 아예 그것과 상관없고 그것을 모르는 어떤 존재를 떠올리며 내가 그러한 존재가 되어 멀리 떨어져보려고 하는 것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 5‧18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동시에 이는 그러한 먼 존재라도 어느 곳 어느 때 5‧18과 만나는 순간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떻게 가능한지 이유를 대고 설명을 해야 하면 할 수 있는 말은 없고 꼭 소설을 통해 그 순간을 발생시키려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보다는 내가 멀리 가보고 더듬어보고 모르는 사람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 그것을 반복해가며 매번 새롭게 만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인 것 같다.
처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사진집을 보았을 때가 열살이었고 90년대 중반이었으니까 내가 태어나기 몇년 전이라는 감각 함께 꽂혀 있던 시집들은 어떤 것은 내가 태어난 후 출판되었고 그전에 출판된 것도 있고 그런 식의 계산을 하며 시간을 짐작했다. 80년 5월이 십몇년 전이라는 것을 정확히 실감하고 싶어서 아는 어른들의 나이를 떠올려보고 그때 몇살이었던 사람 그 이후 태어난 사람…… 하고 헤아려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걸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은 아주 잘 아는 사람이고 그런 식으로 어른들의 얼굴을 보며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그러다 가끔 "어 그러면 5‧18때 몇 살이었겠네요?" 하고 지나가듯 물어보기도 했다. 왜인지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물어보았고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있었지만 더 물을 수는 없었다. 내가 물었던 어른들의 대답 중 자세한 답은 없었고 실감 나고 생생한 것도 없었다. 어려서 잘 몰랐다는 대답, 그렇지 정도의 대답이 다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때의 내가 무언가를 실감하고 접점을 만들어가고 싶어서 해보았던 시도였던 것 같다. 그런 시도를 반복하며 지금은 그 대답을 대답 그대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 대답에는 말하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너머가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이제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보며 무언가를 짐작하는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합하고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런 식으로 시간과의 접점을 찾아나가는 일은 계속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에 응하는 방법이 내게는 소설 쓰기이고 그래서 나는 소설을 많이 쓸 것이다.
박솔뫼 / 소설가
2022.5.17. ⓒ창비주간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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