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촛불연합의 재구성을 위하여
확실히 지난 5년간 한국사회를 가장 강력하게 규정했던 지배인자는 촛불혁명이었다. 촛불혁명이 아니고는 설명되지 않는 현상들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촛불정부를 자임한 정권의 여러 실정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 단독과반을 훌쩍 상회하는 압도적 국회 의석을 안겨준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뒤 0선의 30대 보수야당 당수가 탄생하고 정치교체의 열망에 힘입어 국회 경험이 전무한 이들이 거대 양당의 대선주자로 선출되어 치열하게 맞붙는 등 지난 대선까지 이변은 계속되었다. 특히 지난 2년여간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높은 시민의식은 촛불혁명이 가져다준 각성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촛불혁명으로 심판받은 세력에게 오히려 정권을 반납함으로써 촛불정부 2기 구성에 실패한 지금, 촛불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인가.
우선은 인수위 발족부터 새 대통령이 취임한 최근까지의 상황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역시 전에 없던 현상들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 정부의 국정철학과 정책 방향은 구체적으로 잡히지 않는 대신 검찰개혁과 같은 지난 정부의 핵심의제들이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붙는가 하면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퇴임 대통령의 마지막 지지율에도 못 미치는 조사 결과가 빈번했다. “새 정부의 포부가 펼쳐지기보다는 대선 연장전이 이어지는 듯한 상황이 지속되어 오히려 뒤숭숭한 분위기”(이일영 「인수위 50일, 무엇을 보여주었나」, 창비주간논평 2022.5.11)라는 관찰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다.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 집단 가운데서도 이미 이완과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니 지난 5년을 매듭짓고 새로운 5년을 향해 나아간다는 감각이 널리 공유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촛불대항쟁 이후 치러진 두차례 대선을 비교해볼 필요가 생긴다. 19대 대선 결과를 보면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41% 득표에 그쳤지만, 촛불대항쟁에 동참했던 이른바 촛불연합의 합계 득표율은 70%를 넘었다. 전통적으로 보수 성향을 보였던 유권자 상당수도 이 느슨한 연합에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비해 20대 대선 결과는 윤석열 48.56%, 이재명 47.83%, 심상정 2.37% 순이었으니 이는 일단 촛불연합에 참여했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대부분 이탈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윤석열 후보를 당선시켜준 유권자들이 보이는 최근의 이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촛불연합에 일어나는 해리작용을 관리하지 못한 일차적 책임은 지난 문재인정부와 민주당에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 결과만으로 촛불연합에 파산선고를 내리기는 이르다. 윤석열정부의 출범을 떠받쳤거나 떠받치고 있는 지지층의 구성과 그 결합이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한 것도 촛불연합의 구심력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윤석열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역대 대통령의 취임 직후 지지율뿐 아니라 지난 대선에서 자신이 얻은 득표율에도 이따금 못 미치곤 하는 실정이니 촛불연합의 느슨한 외곽을 차지했던 이들의 윤석열정부로부터의 이탈이 구조화될 가능성도 상존하는 것이다.
정치신인의 대통령 당선이라는 이변이 해석의 초점이다. 직선제 이후 한국에서 대통령은 오랜 정치 역정을 통해 ‘검증’된 거물급 인사나 그 후광을 입은, 따라서 좋든 싫든 상징성이 강한 존재들이었다. 그 상징의 내용은 가령 산업화와 민주화로 대별되곤 했던 일종의 거대담론이라 할 수 있는데 윤석열 신임 대통령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는 상징적이라기보다 플랫폼적 인물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시대정신을 대변하면서 의제를 던지고 중지를 모아 이끌고 나아가는 구심적이고 가치 형성적인 리더십이 아니라, 여러 기득권 이해집단의 욕망이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는 시세 반영적 허브(hub)에 가까운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무런 상징적 내용을 지니지 않는 존재이기에, 담론적 포장마저 거추장스러워지는 온갖 기득권 집단의 적나라한 욕망이 접속하는 장으로 선택될 수 있었다. 이미 우리 사회의 대표적 이익집단이 되어버린 검찰이나 여론의 확증편향을 조장해서라도 영향력과 이익의 증대를 도모하는 언론 등이 대표적이지만 사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태도를 세상의 유일한 질서로 여기는 기득권 세력이 거기에 망라되었다. 촛불혁명의 시대정신을 드러내놓고 부정할 수 없었던 수구보수세력이 새로운 의제나 담론의 구심력 대신 선택한 고육책이 이러한 기득권연대였던 셈이니 가치연합에 이르지 못한 이들의 구조적 불안정성은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어차피 3김시대와 같은 상징적 리더십의 시대는 다시 오기 어렵다. 민주사회에서 현실정치는 모든 것을 갖춘 한명의 성인군자가 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대리자가 권한을 위임받아 수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의 기득권연합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다수’를 조직하는 촛불연합의 재구성이 정치과정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촛불혁명에서 비롯한 정치교체의 여망을 반영하고 다양화된 정치적 의사의 대표성을 강화하는 정치개혁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민주당이라는 도구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러나 촛불연합이 민주당과 진보개혁세력의 단순 합계를 초과하는 것이었음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현재의 민주당과 진보개혁세력 그리고 그들을 수선하고 독려해 촛불혁명을 한단계 진전시키고자 하는 촛불시민들에게 스스로를 갱신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다. 역도 경기를 비유로 들면 지금은 용상의 저크(jerk) 동작을 앞두고 있는 것과 비슷한 국면이다. 턱밑까진 들어 얹었지만 머리 위로 팔을 뻗어내는 데는 1차 실패한 것이다. 안이하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만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과 정의당의 득표만 합해도 과반이었다. 문제는 촛불연합을 재구성할 제도적 토대와 합의의 형성이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2년 여름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2.5.24.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