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
기억되지 못한 6‧20의거, 한센인 이춘상의 삶과 저항
2022년 6월 20일, 국립소록도병원 중앙공원에서 이춘상 의사의 6·20의거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더운 날임에도 많은 이들이 제막식에 참석해 그의 의거를 기렸다. 이춘상은 일제강점기 소록도갱생원에 격리되었던 한센인으로 1942년 6월 20일 소록도갱생원의 스오오 마사스에(周防正季) 원장을 살해한 인물이다. 스오오 원장은 조선과 일본제국의 위생통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자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에게 살해당한 거의 유일한 고위관료다. 하지만 이춘상이라는 이름과 이 사건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 속에서 이춘상의 의거가 무시당하고 의도적으로 지워졌기 때문이다. 그의 의거는 무엇이며, 80년이나 지난 지금 그를 기념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16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이춘상은 열네살에 한센병에 걸렸다. 당시 ‘대풍자유’라는 치료제가 있었고 근처에 대구나병원이 있었기에 이춘상은 이곳에서 2년간 치료받고 퇴원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대구, 부산, 경성 등지에서 만년필, 안경, 수건 등 일용잡화 행상을 한 것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1939년 5월 절도교사 및 장물수수죄로 징역 1년, 벌금 30원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한센병이 재발하여 소록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30년대는 한센인에 대한 절대종생격리가 본격화되어 모든 한센인이 단속돼 수용소에 격리되던 시기였다. 한센인은 경제 활동에서도 사회적 관계에서도 모두 완전히 배제되었기에 그의 삶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1940년 출소한 그는 곧바로 소록도갱생원에 재격리되었다. 당시 소록도는 언론에 환자들의 낙원, 별천지로 묘사되었지만, 이춘상이 목격하고 경험한 소록도는 지옥과 같았다. 20년대 불과 700여명에 불과했던 환자 수가 30년대 중반이 되면 6000여명으로 증가하나, 예산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아 치료와 생활의 질은 급속히 악화됐다. 여기에 갱생원 확장공사와 군수물자 생산에 환자들이 강제로 동원되면서 탈출자와 사망자가 급증했다. 매일 저녁 이춘상은 구타나 감금, 강제노동, 혹은 탈출의 와중에 죽은 사람들을 일기에 기록했다. 스오오 살해 후 소록도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이춘상은 이 모든 죽음을 판사 앞에서 하나씩 열거하면서 이러한 부당한 현실을 세상에 알렸고, 환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책임이 있는 원장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이춘상의 판단처럼 책임은 스오오 원장에게 있었다. 스오오 원장은 조선총독부로부터 환자들을 마음껏 처벌할 수 있는 ‘징계검속권’을 비롯해 ‘감금실’ ‘형무소’ 등의 통제수단을 부여받았다. 그는 환자의 노동력을 사용해 소록도갱생원을 확장하고 물자를 생산한다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고, 환자들의 고통과 죽음 위에서 조선총독부와 일본 황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스오오는 일본과 조선의 유력자들을 초청해 ‘별천지 소록도’를 자랑하는가 하면, 심지어 중앙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워 환자들이 참배하도록 했다.
그는 일본의 한센병 정책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 일본에서도 격리되는 한센인들이 급증하고 치료 및 생활의 질이 악화되어 환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36년 나가시마에 있는 나요양소인 애생원에서 발생한 환자들의 저항사태다. 이에 일본의 나요양소장들은 회의를 열고 스오오를 초청해 ‘효과적’으로 환자를 통제하는 방법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서 스오오는 환자를 가혹하게 다뤄야 하며, 감금실과 형무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 결과 1938년 쿠사쯔에 있는 낙천원에 특별병실이 설치되어 일본 각지의 요양소에서 저항하는 한센인들이 실려와 감금됐다. 영하 20도에 이르는 혹독한 겨울 추위에 많은 한센인이 동사했는데, 그중 다수가 조선인이었다. 스오오의 가혹한 통제방식은 태평양전쟁 시기 ‘대동아공영권’의 ‘한센병 절멸’ 정책 제안에 담겼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렇듯 스오오는 일본제국의 위생통치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기에, 일본 한센병 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미쯔다 겐스께(光田健輔)는 스오오를 이또오 히로부미에, 이춘상을 안중근에 비교하며 스오오의 죽음을 애석해했다.
광복 이후에도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지속되었다. 소록도 당국은 ‘아버지’를 살해한 ‘원생’을 기념할 수 없다며 이춘상을 기념하려는 한센인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시간이 지나 2003년 결성된 ‘이춘상선생기념사업회’는 세차례에 걸쳐 보훈처에 이춘상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 요청했으나 모두 기각당했다. 정근식 서울대 교수는 보훈처가 여전히 한센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이춘상 의거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 비판했다. 기념사업회는 2019년 ‘이춘상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며 조직을 확장했고, 의거 80주년인 올해에야 기념비 제막식을 할 수 있었다.
필자가 졸저 『질병, 낙인』(돌베개 2021)에 썼듯이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일제가 조선에 이식한 근대적 인종주의, 제국주의적 방역 정책하에 만들어지고 강화되었다. 우리가 이춘상이라는 인물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의 행위가 항일과 독립운동의 맥락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대적 폭력성을 내재한 공중보건제도의 피해자로서 문제를 인식하고 저항한 인물이기도 해서다. 우리 사회는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동시에 그의 의거에서 더 많은 현재적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김재형 /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2022.6.28.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