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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만만한’ 공간, 아랫마을의 두번째 이사

김윤영

빈곤사회연대는 여러 반빈곤운동단체들과 함께 ‘아랫마을’이라는 이름의 공간을 꾸리고 있다. 아랫마을엔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재개발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애쓰는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약탈적 금융에 저항하고 가난한 이들의 파산과 회생을 지원하는 금융피해자연대 해오름, 홈리스 당사자를 조직하고 야학을 운영하는 홈리스행동과 노숙인인권공동실천단이 함께 있다.

 

반빈곤운동단체들의 가난한 살림살이, 아랫마을의 시작

 

아랫마을은 2010년 시작됐다. 당시 빈곤사회연대는 다른 단체 사무실을 전전하며 더부살이를 했고, 홈리스행동의 전신 ‘노숙인 인권과 복지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홈리스의 단결을 꿈꾸며 주말배움터를 운영했지만 일주일에 주말 한번 만나서는 운동을 도모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반빈곤운동단체들은 하루걸러 한번씩 회의를 하기 일쑤여서 ‘이럴 바엔 단체를 합치자’는 우스갯소리도 나누곤 했던 터라 정말 함께 사무공간을 만들어보자는 합심에 이르게 됐다. 반빈곤운동의 강화, 그리고 홈리스야학 안정화. 두가지 꿈과 함께 아랫마을이 시작됐다.

 

아랫마을에는 '서울역 반경 2킬로미터 이내에 자리 잡는다'는 입지에 관한 원칙이 있다. 거리 홈리스와 쪽방 등 서울역 근방에 있는 이들이 차비가 없더라도 조금 애쓰면 걸어올 만한 거리가 2킬로미터의 기준이다. 그렇게 찾은 첫 아랫마을은 서대문이었고, 두번째는 원효로였다. 첫 건물은 깔끔한 상가건물이었지만 금세 쫓겨났고, 두번째 건물은 모기와 파리, 간혹 쥐까지 드나드는 오래된 동네의 낡은 단독주택이었지만 10년을 머물 수 있었다.

 

이곳은 자동차가 닿지 않는 소위 ‘맹지’라 건물의 단독 재건축은 허가가 나지 않고 지역 재개발만 가능했다. 건물주 마음대로 새 건물을 세울 수 없다는 점이 가난한 세입자에겐 호사였다. 이삿짐 차가 들어오지 못해 좁은 골목에 줄줄이 서서 짐을 날라야 했지만 197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의 작은 마당엔 감나무, 모과나무, 향나무가 있었다. 오래된 감나무엔 제대로 감이 영글지 않았지만 봄이면 모과꽃 향기가 근사했다.

 

그렇게 매해 돌아오는 봄을 맞으며 아랫마을에 적응해갔다. 봄가을마다 한글반, 합창반, 만들기반과 권리교실 등을 여는 홈리스야학이 개강했다.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부터 강제퇴거 금지, 주거권 쟁취에 관한 한국 사회 빈곤 문제에 관한 다종다기한 일들을 여기서 기획하고 집행했다. 명절이면 가난에 떠밀려 가족과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전을 부치고 작은 차례를 지냈다.

 

아랫마을의 가치, 도시의 틈새

 

아랫마을은 매일 점심밥과 저녁밥을 함께 지어 먹는다. 홈리스야학 학생과 활동가들이 1천원의 식대를 내고 먹는 밥상은 1만원 정도의 부식비로 10인분이든 20인분이든 차려내야 하기에 저렴한 식재료만을 오가는 경향이 있지만, 1천원의 밥값을 모으는 통 앞에 써 있듯 “밥값은 1천원, 없으면 다음 기회에”를 약속할 수 있는 식탁이다. 없으면 다음 기회에, 다음에도 없으면 그다음 기회에. 밥값의 약속에는 별다른 기한이 없다.

 

기한이 없는 약속이 만드는 묘한 틈새, 이 틈새는 아랫마을을 닮았다. 홈리스야학 학생회장 로즈마리는 아랫마을이 ‘만만해서 좋다’고 한다. 쫓겨나는 경험이 많은 홈리스들은 눈치가 빠른데, 아랫마을은 허물없어 머물기 불안하지 않은 곳이란다. 그렇다고 이곳이 만인의 광장이나 교차로, 애정 어린 공동체 같은 곳은 아니다. 무뚝뚝한 활동가들과 신경질 잦은 사람들이 더 많다. 다만 우리는 적당히 밥을 지어 먹으며 천천히 알아가고, 본인이 지은 별명으로 서로를 부르고, 가난한 사람들을 쉽게 쫓아내는 세상에서 박탈당한 뿌리를 느리게 얽어가며 서로에게 일상을 회복하는 틈새가 되어준다.

 

지난 5월에 계약종료 통보를 받았다. ‘재개발될 때까지 편히 지내라’던 건물주는 막상 용산이 개발 호재에 들썩이자 이내 마음을 바꿨다. 동네에 새 건물들이 들어서며 더이상 ‘맹지’가 아니게 되자 매입 문의도 줄을 잇는 모양이었다.

 

시끄러워진 동네를 뒤로하고 세번째 아랫마을을 구하기 시작했다. 10년간 오른 임대료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곱절은 뛰어넘었고, 만만하고 오래된 동네들은 모조리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었다. 두달간 용산역부터 독립문역에 이르는 집들을 돌아다녔지만 조건에 맞는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건물주들은 홈리스야학이니 빈곤단체라는 말만 듣고도 계약을 거절했다. 한번의 가계약 파기를 겪은 뒤 서울역 일대에는 건물을 보여주겠다는 사람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10년간 월세 한번 체납하지 않고 건물주를 대신해 수리와 관리 일체를 도맡아온 성실한 세입자로서 억울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렵사리 새 아랫마을을 찾아 지난 8월에 이사했다. 세번째 아랫마을은 국공유지 위에 서 있는,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지만 서울역과 좀더 가까워졌다. 마찬가지로 낡디낡은 건물이지만 괜찮다. 이 정도는 만만해야 아랫마을답다.

 

꾸준히 살아갈 것이다

 

어영부영 12년을 아랫마을 식구로 살았다. 아랫마을은 나에게 어떤 공간일까 생각해보면, 좋고 낭만적인 이야기가 퍼뜩 떠오르진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만 밥 차리고 치우는 매일의 노동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함께 무엇인가를 도모할 사람들이 있는 가능성의 공간인 동시에 시끄럽고 누추한 일들이 끊임없이 누적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내가 더 좋아졌다가 싫어졌다가 한다. 내 운동에 푹 빠졌다가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다가 한다. 어떤 사랑이 항상 달콤하기만 하던가. 몸과 맘을 다해 시간을 보낸 이곳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자주 깨닫는다. 그래서 오늘도 좋다가 도망치고 싶다가 하는 마음 사이를 갈팡질팡 걸어간다.

 

또 한번 이 도시에 틈새로 남는 날을 연장받았다. 오는 9월 7일에는 작은 개소식도 연다. 쉬운 날이 없었지만 아주 망하겠구나 싶은 날도 없었다는 은근한 믿음이 쌓인다. 아랫마을이 필요한 이들이 있는 한, 이들과 함께 하는 이들이 있는 한 아랫마을은 그럭저럭 살아갈 것이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기꺼이 식탁을 차리는 끈질긴 마음으로 말이다.

 

 

김윤영 / 빈곤사회연대 활동가

2022.9.6.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