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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

토대는 정치불신, 목표는 정권보위: 윤석열정부의 기본 성격에 대하여

강경석

출범한 지 7개월을 지나는 시점임에도 현 정부가 대체 무얼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정부가 이런저런 ‘깃발’을 들어도 국민들이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는 있었지만 지금은 정확히 그 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셈이다. 10·29참사와 같은 비극이 벌어지고 정부의 앞뒤 없는 대응을 지켜본 뒤에는 급기야 ‘국가가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쯤 되면 정부를 향해 ‘자유민주주의라는 텅 빈 기호’ 이상의 새로운 국정 의제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기도 두려워지는데 그게 무엇이든 이미 꺼진 신뢰가 새로이 형성될 것 같지도 않고 대체 무엇을 들고 나올지 예측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물음을 누락하긴 더욱 어렵다. 윤석열정권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여권성향 인사나 언론에서도 반복해서 제기하듯 국정철학이나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에만 안주하고 있기엔 나라 안팎의 위기 징후들이 만만치 않다. 당장 10·29참사의 책임규명 문제만 해도 난항을 겪고 있으며 남북간 긴장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고 신년부터 본격화될 세계적 대침체(Great Recession)에 대한 위기감으로 연말 분위기조차 암울하다. 그러니 현실 진단과 처방을 포기할 수 없다면 정부가 제공하는 청사진만 기다릴 게 아니라, 그들이 지금 당장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 가능한 사실들을 통해 집권세력의 미래 행태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면서 야권과 시민사회가 어떻게 대응할지 모색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한 작업 가운데에서야 오리무중에 빠진 듯한 윤석열정부의 기본 성격 또한 보다 뚜렷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의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의 반응도 하나의 지표다. "화물연대 파업이 북핵위협과 마찬가지"라는 대통령의 발언에 벌써 많은 것이 드러난다. 상식적으로 너무나 얼토당토않은 인식이어서 할 말조차 잃게 만들지만 뜯어볼 필요는 충분하다. 이 발언은 화물연대 파업과 같은 사회적 갈등을 국가안보위협 차원으로 침소봉대하거나 북핵위협과 같은 국가안보 사안을 그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법치’ 문제로 강등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과연 어느 쪽일까? 역대 어느 보수정권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업무개시명령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자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사실 후자에 가깝다. 정권에 위협이 되는 요인이라면 그 크기와 차원이 어떻게 다르든 힘의 우위를 통해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러다보니 국민의 일부인 화물 기사들조차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패턴은 당정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촛불혁명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수구보수세력이 간신히 정권을 탈환하게 된 요인은 알다시피 그들 자신도 반신반의했던 윤석열이라는 동아줄을 붙잡고서였다. 이 정치초년생이 일약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그 자양분을 제공해준 것은 촛불이 요구하는 수준의 개혁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곳곳의 균열을 뚫고 비등했던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 또는 정치혐오였고, 그 자신이 벌써 ‘기성정치에 빚진 바 없는’ 정치혐오의 체현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없고 검찰수사만 난무하는 현 정국이 야권탄압에만 국한될 리 없다. 대통령실이 적극적 당무간섭을 통해 내년에 있을 여당의 전당대회 일정과 출마자를 관리하고 있는 면모만 해도 여권발 정계개편으로 가는 하나의 신호로 볼 수 있다. 법무장관의 당대표 차출‘설’은 아마도 설이 아닐 것이다. 현재의 낮은 대통령 지지율 속에서 정권과 거리가 멀거나 언제든 돌아설 태세가 된 기성정치인들이 당권을 장악하게 될 경우 정권에는 잠재적으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정치불신을 공유한 여당 대표를 통해 이듬해 총선에서 대대적인 ‘공천혁신’을 이룩해낸다면 기대 이상의 성과도 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인바, 정치불신의 확장이야말로 그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따라서 무차별적 검찰수사를 통해 전 정권 또는 현 야권의 ‘위선’을 폭로하고 당권장악을 통한 ‘공천혁신’으로 현 여당을 ‘인적 쇄신’함으로써 정치불신에 기초한 하나의 목표가 달성되거니와 그것은 바로 정권보위다. 정권을 잡아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정권을 잡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기에 남은 과업은 유지존속 이상이 되기 힘든 것이다. 여기서 몇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집권세력이 정권보위에 일로매진하는 동안 사회적으로는 되는 일도 없고 특별히 안 되는 일도 없이 답보하기만 한다면 혹시 모를까 민주주의사회란 묘한 것이다. 갈지자 행보일지언정 지속적으로 갱신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마치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집이 스러져가듯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사용자의 개입 없이도 자동으로 할당되는 설정값이란 사람이 하는 민주주의에선 기대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일정한 하방경직성을 지닌 기본값이 안정적으로 작용했다면 8년 전 세월호참사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10·29참사와 같은 비극이 또다시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집권세력이 권력에 취해 몰랐거나 모르고 싶었던 진실이 바로 거기에 있다.

 

정권보위를 최종 목표로 삼은 정부도 정부라고 할 수 있을까? 아울러 사회 각 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구보수로의 회귀도 실은 어떤 근본적 변화라기보다 흘러간 옛 물결이 이리저리 떠돌다 ‘국가의 실종’을 틈타 빈자리에 잠시 고여 드는 데에 지나지 않은지 모른다. 요컨대 정치불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관건이다. 분열과 봉합을 거듭할지언정 현 정권과 완전히 다른 경로를 개척하기는 불가능한 여권 정치세력이 주축이 될 순 없을 것이다. 세력의 편재와 정치일정으로 미루어 여권 쪽에 구조적 분열 요인이 적지 않다 하더라도 반사이익에만 안주할 경우 야권에도 희망은 없다. 대통령다운 대통령의 자리가 비어 있다면 야권에라도 대통령다운 대통령감이 바로 서서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역대 최저이긴 해도 현 대통령이 30% 안팎의 비교적 견고한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핵심적 이유는 다른 대안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이 될진 모르겠지만 누가 먼저 진짜 대통령다운 정치를 시작하느냐가 미래를 판가름할 것인바 이 위기의 시대를 뛰어넘는 촛불시민들의 집합적 창의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기 위해서라도 그러한 선결조건은 빨리 이룩되면 될수록 좋다.

 

 

강경석 / 문학평론가

2022.12.06. ⓒ 창비주간논평